저는 목회자로서 항상 설교를 해야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설교하는 것이 제 직업이니 누구에게 어렵다고 하소연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화하다가 듣기 싫으면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설교하지마!” 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때론 설교하는 설교자도 힘든데, 듣는 여러분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합니다.
저는 설교강단에 올라서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설교 하는 제 모습이 무섭다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원래 성격은 그리 무섭지 않습니다. 설교할 때는 강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꽤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강단에서 제 본래의 성격과 좀 달라지는 이유가 있다면 신학교 때 설교학을 가르쳐주신 교수님의 영향인 듯 싶습니다. 그 교수님은 설교할 때는 반드시 ‘너-메시지’를 쓰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의 권위 때문에 ‘너는 들으라…’하며 전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자가 스스로 힘이 있거나, 자격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에 ‘너-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측면에서, 당당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로 전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담학 교수님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나-메시지’를 전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왜 너는 그런 식으로 사냐?” 하지 말고, “너의 식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로 주어를 ‘너’에서 ‘나’로 바꾸어 대화하는 기술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제일 힘든 것이 ‘나-메시지’로 말하는 것입니다. “너 아직도 밖이냐? 제발 늦지마라”, “방이 왜 이 모양이니, 청소 좀 해라”.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니, 그만해”, “그만 놀고, 공부해라” … 우리 자녀들과 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 대화가 아니라 정말로 ‘너-메시지’의 설교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강단 위에선 ‘너-메시지’, 강단 아래에선 ‘나-메시지’로 그때마다 빨리 변모해야 하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직업이 설교자라, ‘나-메시지’로 다가가야할 때 스위치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TV 앞에서 얼쩡거리는 아들에게 “TV 앞에 있으니깐, 아빠가 TV보기가 힘들구나”하며 ‘나-메시지’로 전해야하는데, 저는 “야, 비켜”라고 간단히 ‘너-메시지’로 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은 솔직히 문제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강단 아래 있는 우리 모두는 설교식 ‘너-메시지’로 의사전달하는데 익숙한 나머지 서로 정죄하는 부작용에 시달리고, 막상 권위 있는 설교를 전해야하는 강단 위에선 점점 ‘나-메시지’의 유약한 설교가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