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 대한기독교서회 | 158쪽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반(反) 나치운동에 가담하여 독재정치와 싸우다, 히틀러 정권이 무너지기 불과 며칠 전 게슈타포에 의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청년' 신학자이다. 브레슬라우의 명문가에서 출생한 그는 튀빙겐과 베를린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독일이 히틀러의 손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이 '천재 청년 신학도'는 현대 신학의 조류를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이 현대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바 있으나, 그의 사상 못지 않게 그의 '행동'은 많은 지성인의 반향을 낳고 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그 이상일 수도, 그 이하일 수도 없다. 한 번 잠깐 만나는 것이든, 날마다 자주 만나는 사귐이든 간에,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사귈 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그리고 그의 안에서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에 택함을 받았고, 시간 안에서 용납되고,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위한 유일한 터를 놓아 주셨다.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사귀는 생활에 들어가기 훨씬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한 몸이 되도록 묶어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사귀는 생활로 들어갈 때에 요구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감사하면서 받는 자로서 들어가야 한다.

본회퍼는 '홀로 있음'과 '사귐'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귐 안에 서 있을 때만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있고, 또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귐 안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귐 속에서만 우리는 어떻게 바로 홀로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배우고, 홀로 있음으로써만 우리는 어떻게 사귐 안에 서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는 침묵이란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다만 고요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침묵은 결국 하나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으로 복 받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중 말씀을 묵상하며 침묵을 지킬, 정해놓은 시간도 필요하다. 특히 말씀 듣기 전후, 그리고 이른 아침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루를 보내고 사귐을 갖는 데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본회퍼에 따르면, 섬기기를 배우려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영광 대신 다른 사람의 영광을 구한다. 그는 모욕과 상처를 투덜거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본다. 또 그는 아무 꾸밈 없이 진심으로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섬김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듣는 섬김, 서로 돕는 섬김, 형제의 짐을 지는 섬김이라고 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형제에게 죄를 고백하러 가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경건한 사귐은 아무도 죄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눈앞에서 뿐 아니라 사귐 앞에서 자신의 죄를 덮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가 없기나 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형제에게도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는 죄인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이르는 길이 뚫린다. 형제 앞에 죄인으로 선다는 것은 거의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옛 사람은 형제의 눈앞에서 죽는다. 처절하게도 한없이 부끄러운 죽음을 죽는 것이다. "우리가 형제 앞에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이 같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마음과 몸에 깊은 아픔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깊은 아픔에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영원한 축복으로 체험합니다."

그는 1945년 4월 8일 약식 군법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아침 히틀러 저항운동을 이끌던 카나리스 장군을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그들 형제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1906년 2월 4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그에서 죽다."

/송광택 목사(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