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인천공항까지 비행시간은 약 11시간입니다. 좁은 항공기 안에 갇혀서 11시간을 비행한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입니다. 한참 왔나보다 싶은데 시계를 보면 1시간, 또 시계를 보면 1시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시계를 또 봅니다. 한참 온 듯 싶은데 겨우 반밖에 안날아왔습니다. 짜증이 납니다. “이런 겨우 반밖에 안왔네.” 그런데 제 옆에 앉은 나이 지긋한 두부부가 이야기합니다. “비행기 탄지 얼마나 됐지?” “벌써 반이나 왔어요.”
컵 속의 물이 반 남아있습니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우 반밖에 없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 드러나는 극과 극의 표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관점입니다. 사상가 파스칼은 “사람이 같은 사건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같은 일에도 관점에 따라 태도와 마음과 영적 상태가 다르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과거를 살펴보면 그는 결코 사도가 될 수가 없는 사람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체로 계실 때 직접 제자로 부르셨던 12제자에게만 국한되는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친히 목격했어야만 사도의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느 경우에도 해당이 되질 않습니다. 더구나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로 솔직히 고백한 것처럼 사도가 되기엔 그는 자격미달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리 될 수가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전적인 ‘은혜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은혜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감격’과 ‘감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비은혜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불평’과 ‘원망’만이 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아십니까? 불경기에 먹고 사는 일이 힘들 때 포도원 주인이 사람을 씁니다. 이때 일꾼으로 써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일을 시작할 때는 이런 불경기에 일감을 얻었다는 생각이 있어서 너무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마칠 무렵에는 일꾼들의 관점이 변했습니다. 아침 6시부터 나와 일한 일꾼, 9시, 12시, 3시에 나와 일한 일꾼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이 거의 끝날 즈음에 와서 일한 일꾼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똑같이 임금을 줍니다. 그러자 일찍 나와 일한 일꾼이 불평한 것입니다. “불공평합니다. 내가 일한 시간이 얼만데 거의 끝날 즈음에 와서 일한 사람과 똑같은 페이를 받습니까?” 포도원 주인이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은혜의 관점’으로 시작했으나, 서서히 은혜를 잊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관점에서 서서히 수고의 관점으로 관점이 바뀌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싹틉니다. 못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성향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결국 결과의 관건은 ‘관점’입니다. 성실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관점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관점조절의 실패가 결과의 실패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관점조절이 잘 이루어지려면 과도한 비교는 절대 금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은 필수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주권자의 ‘맞춤상황’이라는 생각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관점조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