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보면서 승자와 패자, 금메달을 딴 사람과 메달조차 따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다시금 깨닫는다. 올림픽의 정신이 '평화'라고 하지만 사실 평화보다는 '경쟁'이고, 더 나아가서는 '싸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전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비단 대한민국만 메달경쟁 심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을 방영하는 미국 NBC방송에서도 미국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김연아 사랑도 있지만 대한민국 사랑이 더 큰 것이다.
1651년에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즈가 "리바이어던(욥기 41장1절에 나오는 악어, 혹은 리워야단, 개역한글 구약의 욥기에서 나오는 거대한 동물을 가르킴)" 책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다. 사람은 경쟁구도 속에서 살게 되어 있다고 인간의 자연적이며, 근본적인 모습을 말했다. 이러한 것을 조절하는 기관은 결국 국가의 권력과 제도뿐이라고 하여 국가존재의 포문을 여는 영국 사회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 후 거의 200년 지난 후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설'을 주장했다. 스펜서는 홉즈와 같은 맥락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강한 사람만이 살 수 있다고 하였다. 홉즈나 스펜서나 성경적인 면에서의 접근보다는 인간적이며 진화론적인 접근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오늘 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깨우치는 바가 크다. 세상에 사람이 강한 사람만이 살아가는 세상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강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신약성경에 한 앉은뱅이가 성전 미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달라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매일 그것이 그의 생활 전부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이었기에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 그것이 그의 타성이 되었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 만성적인 모습이었다.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기생적인 연약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어느 날 베드로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사도행전3:6). 그 후 이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고 일어나 걷고, 뛰고, 또 동네로 가서 병을 고침 받은 사실을 알렸다. 이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채 타성에 젖어들어 만성적인 습관에 젖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걸하며 매일 앉아있는 앉은뱅이처럼 하나는 알면서도 둘은 모르고, 셋은 생각지 아니하며, 넷은 꿈도 꾸지 않아 변화의 과정과 단계를 겪지 못할 수 있다.
사자가 동물의 왕인 이유는 그가 가진 야성 때문이다. 사자가 동물원에 갇혀 있을 때 그 사자는 더 이상 사자(獅子)가 아니라 사자(死者)에 불과하다. 주는 닭고기나 소고기를 먹으면서 동물원에서 사람 앞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그 사자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큰 입을 벌려 하품할 때 구경하는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사자의 위용이 있다고 하지만 그 사자는 무늬만 사자일 뿐이다. 야성은 갇혀 있을 때 살아나지 않는다. 야성은 들판에 있을 때 살아난다. 먹이가 있을 때가 아니라 먹이를 찾아야만 할 때 야성이 생긴다. 내 먹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달려가야 하고, 싸워서 내 영역을 지켜나가는 싸움을 통해서 야성이 생긴다. 단지 화가 나서 입을 벌려 깨무는 정도를 야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성에 불과하다. 야성은 소리가 강하다고 야성이 아니다. 야성은 조용한 가운데서 압도하는 힘을 보여주는 야성이다. 야성은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병듦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야성이다.
김연아 선수가 이번에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그것으로 자기를 잃어버린다면 김연아는 연아(軟兒), 연약한 아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시금 자신을 세워서 또 다른 삶의 영역을 만들어 간다면 반드시 연아 인생에 아성(牙城)을 낳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아름다운 이정표를 세울 것이다.
살면서 때때로 가난할 수 있다. 때때로 병들 수 있다. 때때로 실패할 수 있다. 그럴 때 타성에 젖어서 손을 내밀고만 있으면 만성적 의타성만 낳는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용기, 힘, 의지, 믿음을 갖는 야성을 가질 때 아성을 낳는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 사랑을, 나라에 희망을, 교회에 덕을 세워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