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초나라에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있었습니다. 상인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소리쳤습니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껌벅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모순(矛盾)이란 말이 유래하였습니다. 모(矛)는 창을 뜻하며, 순(盾)은 방패를 뜻합니다. 이후 ‘모순’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깊이 살펴보면 신앙생활 또는 교회생활 안에도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점들이 많이 존재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구하지만 독자를 바치는 것은 싫어합니다. 요셉처럼 꿈꾸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꿈의 값을 치루는 것은 피합니다. 엘리야처럼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목숨을 건 도전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쓰임받는 삶을 원하지만 헌신은 사양합니다. 직분은 원하지만 섬김은 싫어합니다. 복음의 가치는 알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힘들어 합니다. 교회는 좋아하지만 성도들은 부담스러워 합니다(교회가 곧 성도인데 말입니다). 신앙성장을 위한 좋은 환경은 원하지만 그 환경을 만드는 일에는 인색해 합니다. 성경의 소중함은 고백하지만 읽는 것은 어려워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원하지만 전도는 자신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 재정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만 십일조는 힘들어 합니다. 순종을 외치지만 그 순종에서 자신은 항상 열외입니다. 은혜를 구하지만 타인에게는 항상 비은혜로 접근합니다.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자신은 늘 오해합니다.
모순은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입니다. 모순된 신앙생활은 자기합리화를 만들고 그 결과 풍성함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신앙생활을 형성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순된 신앙생활에 대해서 돌직구를 던지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태복음 23:23, 새번역)”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중요하며, 그 십일조 정신 또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순된 신앙생활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때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모순된 신앙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둘 다 선택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구하면 독자를 바치는 것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꿈의 사람이 되기 원하면 꿈을 위해 치루는 값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쓰임받기를 원하면 헌신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직분을 원하면 섬김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복음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복음전하는 일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를 좋아한다면 성도를 사랑하는 것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좋은 환경을 원한다면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판단을 원한다면 판단받는 것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체험을 원한다면 기도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재정에 관심을 갖는다면 십일조 생활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훈련에 대한 평가를 원한다면 훈련받는 일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순종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순종 또한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은혜를 원한다면 은혜를 베푸는 일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이해를 구한다면 이해하는 일도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 시대 성도들의 문제는 ‘모순신앙’입니다. 그렇기에 모순을 깨뜨리는 신앙생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