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관계
4) 헬레니즘의 보편성
이런 다양성과 더불어 이 시대 전체의 특색 중의 하나는 보편주의(universalism)와 특수주의(particularism)가 공존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Hellenism과 마찬가지로 Judaism 속에도 나타난다. 여기서 보편주의는 진보주의 그리고 특수주의는 보수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주의는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Judaism에 비해 보편주의 적인 색채가 강한 Hellenism을 수용한 결과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와 동시에 자기들의 종교 또는 신앙이 단순히 유대인들에만 해당하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해당하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필론이나 조셉푸스에게서 잘 엿볼 수 있다. 폴 라마르슈(Paul Lamarche)라는 불란서학자는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한 세례요한의 말을 구속의 보편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동의하던 안 하던 간에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계를 구원하러 오시고 또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분부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태어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4. 맺는 말
“군사적으로는 로마가 희랍을 정복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희랍이 로마를 정복했다”고 흔히 말해진다. 로마인 자신들도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버질(Virgilius, Vergil)과 함께 로마문학의 황금기(Golden Age: 80 BC-14 AD)를 대표하는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Horace, 65-8)는 “정복당한 희랍은 난폭한 승리자를 정복하여 촌스런 로마에 예술을 가져왔다(Graecia catpta ferum victorem cepit et artes intulit agresti Latio).”라고 말했으며, 그 다음 Silver Age(14-138 AD)의 대표적 작가 겸 철학자인 세네카(Lucius Anneus Seneca BC 4-AD 65)는 “우리는 희랍인들 앞에 서면 작아진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초까지 희랍인들은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경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희랍인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희랍에 대한 연구가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이루어지면서 차츰 그들도 우리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룩한 위대한 문화에 대한 감탄의 감정은 크게 약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의 서정시인 쉘리(Shelley, 1792-1822)는 “우리는 모두 희랍인들이다.…만일 희랍이 없었던들 우리는 여전히 야만이고 우상숭배자들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쉘리의 이 말은 기독교인들 특히 동양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근대의 독일의 철학사가인 첼러는 희랍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희랍인들 이상으로 자기들의 천성과 제도들, 윤리와 관습에 대해서 편견 없이 판단한 민족은 없었다. 다른 어떤 민족도 희랍인들만큼 자기들 주위의 세계와 우주의 깊은 곳들을 뚜렷하게 응시하지 못하였다.”
희랍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존경과 감탄의 감정은 반드시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일신사상과 신앙 그리고 높은 도덕적 생활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의 주목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희랍인들 중에서도 유대교로 개종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성경은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fearers)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유대인들은 시기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는데, 잘 알려진 예를 고대와 근대에서 하나씩만 든다면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필론시대에 로마총독 플라쿠스(Flaccus) 치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던 박해와 약탈을 들 수 있고, 또 하나는 히틀러에 의해서 자행된 대학살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히틀러의 학살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유대주의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의 대학살 이전까지는 유럽인들의 유대인들과 유다이즘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 포로 이전의 유대교는 생동감 있고 생산적이었음에 반하여 그 이후는 무기력하고 비생산적인 종교로 전락했으며, 랍비들은 율법의 정신이 아니라 그 형식에 집착하여 세부적인 것이나 따지는 사람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이라고 생각하였다.
1947년 에 이루어진 쿰란문서의 발굴 이래로 유다이즘에 대한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종래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다이즘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는 성경이 보여주지 않은 면들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자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였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카톨릭과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기독교신학자들과 유대인학자들 간에 대화와 공동연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과 유대인들 간에 오랫동안 쌓여온 편견과 오해가 상당히 줄어들고 상호이해가 크게 증진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과는 달리 유다이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그 기간이 짧아 아직도 초기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아는 것에 비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아직은 유다이즘에 대한 확실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따라서 유다이즘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에 대한 연구 역시 초기단계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필자는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세계의 초일류강대국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신학과 세계선교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어 세계의 우수한 젊은이들이 한국에 와서 신학을 배우고 말씀 안에서 훈련을 받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 신학계가 보다 업그레이드되고 더 나아가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를 촉진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려는 뜻에서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특징과 이들이 기독교 및 서구사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가까운 장래에 보다 자세하게 고찰할 기회를 가질 생각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