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비평가이자 역사가였던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오늘을 사랑하라>는 시에서 과거로 흘러가 버린 어제도,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도 아닌, ‘오늘’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고 외쳤습니다.
2013년을 뒤돌아 보면 사랑하지 못한 수많은 ‘오늘들’이 저의 삶에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을 봅니다. 해가 바뀌면서 사랑과 생명으로 꽃피우지 못한 사산(死産)된 시간의 잔해가 쌓일수록 저의 마음 또한 후회와 황망함으로 점점 채워져 갑니다. 아마도 시간을 대하는 저의 마음이 점점 경건해진 탓일 것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시간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이 존재합니다. ‘물리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입니다. 즉, 시계가 측량하는 시간과 우리가 의식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물리적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부르고, 체험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템푸스(tempus)라 합니다. 물리적 시간의 최소 측정 단위인 초는 세슘 원자가 발산하는 전자파의 주파수가 91억 9263만 1770회 반복되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물리적 시간은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으로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라면 제2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주관적 시간은 시간의 물리적 흐름이 일정함에도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에 몰입하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만 몰입하지 않으면 시간은 천천히 흐릅니다.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20대에 시속 20킬로미터, 30대에는 30킬로미터, 40대에는 40킬로미터, 50대에는 50킬로미터 속도로 인생의 시간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나이 들수록 시간의 흐름이 점점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주관적 시간 감각이 달라진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일정 기간의 시간이 전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50세의 어른과 10세의 아이에게 있어서 1년이라는 시간의 양은 동일하지만, 그들 각자가 체감하는 흐르는 시간의 속도감은 결코 동일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루살이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사이에 물리적 시간의 차이는 엄청 크겠지만, 어쩌면 감각적 시간의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억측인가요? 하루살이가 해 지기 전에 냇가나 전등 아래 떼 지어 날아다니는 것은 구애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 합니다. 아래위로 열심히 군무하는 수컷들 속으로 암컷들이 날아들면 쌍쌍이 짝을 지어 허니문 비행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허니문 비행이 끝나면 하루살이는 물속에 알을 낳고 몇 시간 만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하루살이의 교훈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다 사라지는 하루살이의 삶이 그저 덧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의 생애에 비하면 하루살이의 생이 보다 생동적이고 열정적이지 않습니까? 물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고귀함을 어찌 한갓 미물인 하루살이에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게으른 자를 향하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고 일갈(一喝)했던 잠언서의 기자는 인간이 한갓 미물에게서도 배워야 할 지혜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지요.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귀합니다. 그들에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있어 귀합니다. 아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귀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 하는 것보다는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중죄(重罪)를 짓고서 뉘우침의 시간없이 감옥에서 한평생을 산 죄인보다는 절절한 사랑하며 반평생을 불꽃처럼 살다가 죽은 사람의 생이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대신 현재에 충실하며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시간을 최대한 선용(善用)하는 비결입니다. 형형색색의 오늘이 모여 우리의 생애를 만들겠지만 냉철하게 따지고 보면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입니다. 내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선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 묵직한 질문에 대한 답은 김기석 목사의 글로 대신합니다.
이 생기 충만한 날,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들사람을 만나고 싶다. 스스로 자기 삶의 입법자가 되어 새로운 생의 문법을 만들어 가는 사람. 전사가 되어 낡은 가치를 사정없이 물어뜯고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기꺼이 끌어안는 성스러운 반역자들. 새로운 세상은 그들을 통해 도래한다.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이는 그 길을 일러 십자가의 길이라 했다. -김기석 산문집《일상순례자》(웅진뜰, 2011)에서.
2014년 오늘도 하루가 집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기는커녕 하루살이처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도 못한 채 하루가 아쉬운 빛을 띠고서 유성처럼 과거로 날아갑니다. 우리에게 임했던 오늘이라는 구원의 시간은 어떤 이에게는 한평생을 살아도 오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여전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2014년, 시간의 끝자락이 오기 전에
레바논계 미국 시인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은 시간을 강처럼 여기고 강둑에 앉아 그 흘러감을 지켜보려 하는 것을 인간의 우둔함이라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시간을 측량하려 하지 말고 어제는 다만 오늘의 기억이고 내일은 다만 오늘의 꿈임을 깨우쳐 시간을 초월해 사는 생명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초월해 산다는 것은 물리적 시간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사람으로 창조되는 영적 경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영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으로 일상의 단조로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을 양질화하는 것이 신앙인의 경건한 자세일 것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영원에 잇대어 사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 누리는 가장 큰 복이 될 것입니다. 2014년이란 한정된 시간의 끝자락이 불현 듯 우리 앞에 펼쳐지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을 향해 소박하지만 단정하고 힘찬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