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Photo :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어느 날 좀 먼 곳에서 교회를 오시는 집사님 댁으로 심방을 갔다.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 앞에 가던 자가용과 버스가 도로에서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자가용 운전사와 버스 운전사는 창문을 열고 뭔가를 서로 주고받으며 말했다. 화가 단단히 난 듯하다. 물론 뒤쪽에 있는 차들이 빵빵거리고 야단났다.

그런데도 자가용 운전사가 차에서 내렸다. 버스 운전사 가까이로 가더니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가용 운전사를 향해 이런저런 말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낯뜨거운 상황이 되자 자가용 운전사는 철수했다. 부끄러운 듯 차를 타더니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운전을 하고 있던 목사님께 물었다. "누가 잘못한 거야?"

"제가 보니까 버스 운전사가 갑자기 가던 길을 막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가용 운전사가 화가 난 것 같구요."

"그럼 잘못한 사람이 되레 이긴 셈이네. 버스 승객들의 원성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네."

"자가용 운전사 입장에서는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지요."

자가용 운전사는 억울한 셈이다. 옳고 그름도 정확하게 따지지 않고 자기들 편리에 따라 편을 드는 승객들. 승객들의 원성을 힘입어 더 당당해진 버스 운전사. 자신들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고 뒤에서 빵빵거리는 사람들. 자신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질 수밖에 없는 세상. 이들 모두 원망스럽다. 화가 치민다.

그건 그렇고.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자가용 운전자 입장에서 화가 난 건 분명하다. 갑자기 길을 막았으니 자칫 잘못했으면 사고도 날 수 있고.

그러나 화를 다루는 지혜를 좀 더 발휘했으면 어땠을까? 버스나 택시 때문에 화가 솟구치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들은 시간을 다투는 사람들이다. 생계와 직결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좀 더 너그럽게 생각해 주면 순간적인 분노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택시 기사나 버스 운전사들도 반성이 필요하다. 다른 운전자들이 조금만 거슬리는 운전을 해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은 난폭운전을 한다. 도로가 자기네들 점유물이라고 생각하는지?

화가 많이 날 때면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만약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화가 가라앉은 후에 해야 한다. 그래야 실수와 실패를 줄일 수 있다.

'참을 인(忍자) 3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순간적인 분노는 참아야 한다. 화가 난 상태에서 하는 말은 반드시 후회한다. 홧김에 하는 행동은 천추의 한을 남긴다. 화가 치밀 때 순간을 넘기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현장을 잠시 피하는 것도 좋다. 결정을 보류하는 것도 지혜다.

어떤 상인이 장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때 한 스님과 함께 걷게 되었다. 적막한 산길을 말동무 삼아 걸으면서 스님이 말했다.

"이렇게 함께 길을 가는 것도 큰 인연이니 내 그대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혜의 말을 일러 주리다."

"지혜의 말이오?"

"그렇소.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날 때는 꼭 이 말을 생각한 후에 행동하시오."

"대체 무슨 말입니까?"

"앞으로 세 걸음 걸으며 생각하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생각하라. 성이 날 때는 반드시 이 말을 생각하시오. 그러면 큰 화를 면할 것이오."

상인은 스님이 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었다. 그런데 방문 앞에 웬 신발이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는 아내의 신발. 다른 하나는 하얀 남자 고무신이었다.

창에 구멍을 내고 들여다 보았다. 아내는 까까머리 중을 꼭 껴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상인은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부엌으로 가서 식칼을 가지고 뛰어 나왔다. 막 방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스님의 말이 생각났다.

상인이 씨근덕거리며 스님의 그 말을 외면서 왔다갔다 하는 소리에 아내가 깨어 밖으로 나오며 반갑게 맞이했다. 이윽고 스님도 뒤따라 나오며 말했다. "형부, 오랜만에 뵙습니다."

처제가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까까머리 중은 바로 상인의 처제였던 것이다. 상인은 칼을 내던지며 스님이 들려 준 말을 다시 한 번 외쳤다. "앞으로 세 걸음 걸으며 생각하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생각하라!"

성숙한 사람은 분노의 상황을 다루는 지혜가 있다.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상황은 다스려야 한다. 상황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난 평소에 아내에게 고마워하는 게 있다. 내가 화가 좀 날 때 아내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때로는 침묵하는 아내가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알고 있다. 아내의 마음을. 결국 나에게 일어나는 화를 더 자극하지 않고 지혜롭게 다루는 기술을. 그리고 며칠 후에 아내는 다시 그 속내를 꺼낸다. 그러면 아내가 이긴다. 분노를 다루는 또 다른 비결이 아닐까?

미국의 의학자인 엘머 게이즈 박사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그는 분노 상태의 날숨을 냉각시킨 뒤 증류수에 타서 쥐에게 주사했다. 그랬더니 그 쥐는 죽었다. 또 1시간 동안 분노하는 '호흡 독'을 분석해 보았다. 그랬더니 80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이 검출됐다.

분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섭다. 분노가 치민 상태에서 하는 말은 칼을 들고 살인하는 것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칼을 들고 설치는 사람만 무서운 게 아니고 분노해서 아무렇게나 퍼붓는 사람이 정말 무섭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분노는 누군가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하고 폭력을 일으킨다. 분노를 내면화하면 한(恨)이 된다. 분노는 마음과 기억의 창고에 보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음과 기억의 창고에 보관된 한(恨)은 내면에 숨어 있다가 언젠가 폭력적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것이 바로 보복이다.

바울은 말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솔로몬 역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나를 성령께 조용히 내어맡기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