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목사님,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희 집에 심방 한번 오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그는 매우 간절하고 송구스런 마음으로 전화를 했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냥 그러마고 약속하고 그 집을 찾아갔다. 그는 집도 한 칸 없이 아직도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소파로 안내되어 기도를 하고 고개를 드는데 뜻밖에도 그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넙죽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러고는 다짜고짜로, "목사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른 채 멍하니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그는 정색을 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많이 욕했던 사람입니다. 단 한번도 목사님을 만난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목사님은 그저 그런 목사라고 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목사님의 설교 테잎을 듣고서는 놀랐습니다. 너무나도 제가 생각했던 목사님과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몇 년에 걸쳐 목사님의 테잎을 몽땅 구해서 어제까지 300개를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제 마음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목사님은 아주 훌륭하신 목사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직접 저희 집에 모시고 사죄한 다음 목사님의 교회에 나가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이 못난 놈을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십시오." 하고서는 얼굴을 드는 것이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태권도 사범 같이 생겼고 몸도 작지만 다부지게 생겼다. 눈도 자그만 한데 빛이 나고 있었다. 깡께나 있게 생긴, 그래서 자기 말마따나 제법 사람을 판단께나 할 스타일이었다. 진짜 성령으로 깨지지 않는 한 말썽께나 일으킬 그런 相(상)이었다. 하지만 한 목사의 설교 테잎을 300개나 구해서 들었다면 그 의지 한번 높이 살만 했다. 두 말 않고 손을 내 밀었다. 그리고 기꺼이 환영한다고 마음을 열어 그를 맞아 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 친구하고 첫 사귐이 이루어졌다.
그는 자그마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안정된 이민 생활을 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 후 자그마한 집도 마련하고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직분도 받으면서 그렇게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룩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아침 일찍 찾아왔다. 그 시간은 세상없어도 세탁소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참으로 절망적인 소식을 가지고 왔다. 늘 목이 아파서 좌우로 돌리기도 힘들었는데 매일 같은 단순 노동을 계속해서 그렇거니 하고 무시했는데 최근에 너무나도 아파 정밀 검사를 받고 오늘 아침에 그 결과를 보려고 병원에 갔었는데 목 암이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단다.
참으로 이렇게도 암담하고 황당할 때가... 남다르게 유별나게 만났던 사람이라 누구보다도 가슴속에 많은 추억을 안고 하나님을 섬겨 오던 안수 집사였는데... 눈앞에 사람을 두고 자신의 사형 선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연 목사는 그 면전에서 무엇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곧 나을 것입니다. 괜찮을 겁니다..." 그 어느 것도 지금 눈앞에 앉아 최후 선언같이 전하고 있는 그 집사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단 둘이 마주 앉아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는지 지금도 물어 보고 싶다.
그 이후로 그의 목엔 머리 만한 혹이 자라나기 시작하였고 돌처럼 굳어져 갔다. 그 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믿음이 그의 속에서 곱게 곱게 영글었던지 그는 참으로 대견스러울 만큼 잘 이겨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히려 위로를 전하고 조금도 흐트러짐이나 부정적인 사고를 갖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끝내는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목회 30여 년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었지만 이렇게도 보람있고 깨끗한 만남과 이별도 없었던 것 같다.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었다. 그가 하나님을 진실로 영접하고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 강직한 성격과 강한 자존심으로 인해 죽을병에 걸렸음을 알았을 때 그는 아마 자살하였는지도 모른다.
암 덩어리를 드러내지 않으면 호흡조차도 곤란해진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수술을 받으러 갔을 때 기다리는 몇 시간을 병원에서 함께 있어 주었다. 그 때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목사님, 제가 만약 예수님 믿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수술실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결국은 죽을 것인데 뭣하러 사서 고생합니까. 간단하게 끝내 버리지요."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였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았다. 어쩌면 생긴 것하고 그렇게도 정 반대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신앙생활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또한 윤리 도적적인 군자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다. 성경이란 말씀을 통해서 말이다.그를 처음 만났던 첫인상과 그를 마지막 보내던 끝 순간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나는 이렇게 결론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도 바꿀 수 없는 강한 자아를 300개의 설교 테잎이, 그 속에 담겨 있는 말씀이 그렇게도 놀랍게 그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마치 오래 살지 못하고 곧 천국에 가야 할 준비라고 시켰던 것처럼 그는 짧은 시간 속에서 그토록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를 통하여서 신앙의 위력을 그토록 깊이 실감해 보았던 것이다. 같은 일을 오래 하면 타성에 젖기 쉬운데 나의 설교 테잎을 300개나 듣고 나에게 왔다가 내 손으로 천국에 보내 준 그 친구 때문에 오늘도 타성에 젖지 않고 열심히 복음 전하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싶다. 그가 떠난지 어언 10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가 보여준 신앙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힘든 목회 일선에서 이와 같은 성도들이 있기에 오늘도 목회자들이 기쁨에 가득찬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