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랴라고 하는 곳에 고넬료라고 하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지역이 로마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로마사람 백부장인 고넬료가 그곳에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점령지역은 이스라엘과 가장 인접한 가이사랴 지방입니다. 가이사랴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 고넬료는 점령군 파견대장입니다. 그래도 그는 망한 나라의 하나님을 상당히 흠모하고 연모하고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늘 회당에 들어가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길들여져야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신앙적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해 되는 일도 없고 먹고 살기가 상당히 힘든 형편이었는데, 로마 군대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서 보내주는 고급스럽고 넉넉한 식량과 옷가지로 헐벗고 굶주리는 유대인들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경건하게 하나님 마음에 들어보려 애썼고,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헐벗고 굶주릴 때에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나누며 사랑으로 보살폈습니다.
하루는 고낼료가 정해놓은 기도시간인 제 구시(지금의 오후 3시)에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빛난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나 “네가 하나님의 백성을 보살피고 구제하며 경건한 생활을 힘쓰고 날마다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으니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초청하라. 그가 내 말을 네게 전해줄 것이다. 그는 바닷가 피장(가죽을 가지고 생활 도구를 만드는 사람)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욥바는 지금의 이스라엘 수도인 지중해 서해안에 있는 텔아비브라고 하는 도시입니다. 이에 그는 즉시 자기 수하 중 경건한 사람 둘을 보내어 시몬을 모셔오게 합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때였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려 제 육시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는데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운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합니다. 이것을 ‘엑스타시스(Ekstasis)’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관적 계시, 즉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까 고넬료에게 보여주신 장면은 헬라어로 ‘호라마’라고 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 광경, 출현, 환상’을 의미합니다. 큰 보자기의 네 귀퉁이를 매었다는 것은 동서남북 세상 전체를 내포하는 의미가 있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행10:4)”고 합니다. 이에 두 번째 말씀이 들리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말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있은 후에 이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베드로가 의식개혁을 할 수 있도록 ‘엑스타시스’ 방법으로 깨우쳐주시는 장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정통 유대인의 혈통에 유대인의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한 상에서 밥을 먹어도 안되고 결혼을 해도 안되며 서로 어울릴 수도 없으며, 구약시대에는 굽이 갈라진 짐승, 새김질 안하는 짐승들은 속되고 가증된 것으로 여겨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자기 백성만을 선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셨다는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베드로의 의식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전개되는 시발점에 선 일꾼으로서 복음을 전하되 하나님이 구원시키실 대상이 유대인으로 제한되어있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해 그중에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으로 정해지는 법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상당히 궁금해할 때 문밖에서 고넬료가 보낸 로마사람들이 그를 찾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행10:19-20)”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두 사람인데, 베드로를 찾아가서 만나게 하신것은 베드로를 모셔다가 고넬료와 함께 있는 택하신 사람들로 성령을 받게 하셔서 그들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기 위한 목적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내려가 그 두 사람을 만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를 묻습니다. 22절에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고 답합니다. 이들은 로마군대의 군인들로 그들이 보기에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나이 들어 볼품없어 보였을 것이며 그의 영적인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하대하며 말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으로는 이방인과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날의 환상을 본 이후로 선민사상이 허물어진 베드로는 이 두 사람을 청하여 잠을 자고는 이튿날 아침 욥바에서 은혜받은 여섯명과 함께(행11:12)가이사랴로 떠납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갔을 때 고넬료가 자기가족과 그와 가까운 사람들, 자기의 부하들을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베드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치 하나님을 맞이하는 자세로 벌떡 일어나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하는 말이 나도 사람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말라하시기로 당신의 초청을 사양하지 않고 내가 여기에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무슨 일로 여기로 불렀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고넬료는 자신이 본 환상과 하나님의 지시하심대로 했음을 말하며 환영의 말을 전합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전달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갈망하는 마음으로 모두 모여 있음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34절 이하 복음의 내용을 그들에게 전달합니다.
베드로는 ‘엑시타시스’를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고 합니다. 36절에 구원의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화평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담을 하나님께서 허물어뜨리셨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37-38절에서 두 가지만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만남의 섭리는 반드시 영적 구원을 통해 성령이 임하시기 위해 성령받은 목자와 죄인들을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로 인도하심을 받고 목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도 그 말씀에 깨어지는 회개 역사가 없다고 하면 그 인생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아니고 지옥 갈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옥은 참으로 불행한 곳입니다. 마가복음 9:48-49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 이하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3-26)”고 음부에 대해 묘사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이 음부보다도 더한 지옥에 가지 않게 하시려고 회개하여 성령을 주시고 구원시켜 주시기 위하여 불러주신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것은 죄 값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죄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를 깨달아서 성령이 시키시는 회개로 철저히 자기 죄를 애통하고 자복하며 회개해서 예수님 이름으로 용서받을 때 비로소 죄값인 지옥형벌에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마태복음 1:21에서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의 죄를 영원히 용서받게 해주시기 위한 대속의 희생양으로 죽임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고 베드로가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다고 44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불가항력적 은혜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고넬료는 그토록 하나님을 사모했고 경건한 삶을 통하여 구제와 기도에 힘쓰고 그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시고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 얻게 되기를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합니다. 하늘은 세례요한 이후 하늘나라를 욕심 내고 그곳을 차지하고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여러분들의 신앙은 태만하고 세상 허욕과 허세, 혈기와 정욕에 차있고 물질적인 것에 뜻을 두고 살기 때문에 그 속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가 메마르고 인생이 삭막하게 심령이 메말라 죽어가고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형편이 풀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육신의 욕구를 따라 살기 때문에 영적으로 형편없이 메마르고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45-46절에 보면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고 방언도 하고 하나님 높이는 말하는 것도 들으면서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는 말씀이 고넬료를 통하여 이루어진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듯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만족하게 하실 것이며 굶주린 심령에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