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교회사 가운데 끊임없이 이어져온 주제였습니다.
이를 다루기 전에 마틴 부버와 함께 20세기 유대 하시디즘(Hasidism) 최고의 사상가이자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을 이끈 행동주의자이기도 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말을 인용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거나 모르거나 우주의 드라마의 한 배역을 맡는 것이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삶이란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책임있게 이해하는 것도 그 속에 포함된다.”
전체와의 관련성을 잃어버린 채 자기 일에만 미친듯 몰두하는 현대인들은 참사람의 길에서 벗어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 세상 사람들만 그러합니까? 거룩한 소임을 맡겨 이 땅으로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을 잊은 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 또한 자신을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무신론자들과 다름없습니다.
현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회에서 책임적 존재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입장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저는 다섯 가지의 입장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각 입장이 지닌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겠습니다.
첫번째 입장은 그 둘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아 양자택일해야 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자세로는 점점 다원화되어가는 사회를 복음으로 소통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두번째 입장은 교회를 세상의 일부로 여기는 자세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가 문화의 일부요 그것에 예속되어 있다는 이러한 입장은 우주 전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한 성서의 가르침과 상충되며 사회와 문화 속에 깊이 내재한 악의 실체와 파워에 대한 순진한 이해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입장으로서 교권이 정치제도에 대해 도덕적 권위를 지닌다고 보아 교회가 사회 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대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의 정신, 즉 캐노시스사상에도 위배되며 교권주의가 지닌 위험성은 역사가 이미 증언하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그 둘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두 권위의 체계인 교회와 사회의 역설적 관계에서 역사 너머의 구원만을 바라보고 현재 인내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자칫 크리스천의 책임 영역을 교회 안으로만 가두고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입장은 타락한 인간 본성이 반영된 사회와 문화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든지(첫번째 입장) 그저 초역사적 구원만을 바라고 인내하는 것(네번째 입장)이 아닌, 교회가 사회와 문화 속에 뿌리내린 악의 요소를 복음의 정신으로 기경(起耕)하는 자세입니다.미래적 구원도 중요하지만 당장 현재적 갱신이 더 시급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섯번째 입장을 지지합니다.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을 담은 휘튼 선언, 로잔 언약, 그리고 그랜드래피즈 보고서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한결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21세기는 가속적 사회 변동으로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교회 안팎의 도전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경계는 건물과 그 담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정체성과 그것의 실천에 있습니다. 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상생하되 복음의 정신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헛된 세속적 가치를 혁파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변혁하는 그런 자세가 요구됩니다. 복음의 정신이 무엇이냐는 개인마다 교파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겠지만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땅으로 하강(下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의 정신과 섬김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은 권력과 이윤과 쾌락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에는 그것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는 초월적 가치의 영역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월적 영역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에 쉽게 동화되어 덩달아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게 됩니다. 나눔, 돌봄, 섬김, 생명, 평화, 그리고 구원을 선포하고 그것들을 복음의 정신에 담아 실천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초월적 영역에 서서 묵시적 비전으로 잘못된 문화와 불의와 반복음적 풍조를 사회로부터 추방시켜 나가야 합니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앨런 뵈삭(Allan Boesak)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불의가 자행되는 거리를 거닐면서, 거짓이 횡행하는 세상에 살면서 응당 표현해야할 ‘거룩한 분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못된 사회 질서를 하나님의 의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세상은 동료의식을 느껴 교회를 무척 반길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2천여 전에 세속화된 교회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교회가 세속적이고 악한 가치를 변혁시키지 않으면 결국 교회는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그 속에 함몰하고 말 것입니다.
이를 다루기 전에 마틴 부버와 함께 20세기 유대 하시디즘(Hasidism) 최고의 사상가이자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을 이끈 행동주의자이기도 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말을 인용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거나 모르거나 우주의 드라마의 한 배역을 맡는 것이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삶이란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책임있게 이해하는 것도 그 속에 포함된다.”
전체와의 관련성을 잃어버린 채 자기 일에만 미친듯 몰두하는 현대인들은 참사람의 길에서 벗어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 세상 사람들만 그러합니까? 거룩한 소임을 맡겨 이 땅으로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을 잊은 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 또한 자신을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무신론자들과 다름없습니다.
현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회에서 책임적 존재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입장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저는 다섯 가지의 입장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각 입장이 지닌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겠습니다.
첫번째 입장은 그 둘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아 양자택일해야 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자세로는 점점 다원화되어가는 사회를 복음으로 소통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두번째 입장은 교회를 세상의 일부로 여기는 자세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가 문화의 일부요 그것에 예속되어 있다는 이러한 입장은 우주 전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한 성서의 가르침과 상충되며 사회와 문화 속에 깊이 내재한 악의 실체와 파워에 대한 순진한 이해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입장으로서 교권이 정치제도에 대해 도덕적 권위를 지닌다고 보아 교회가 사회 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대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의 정신, 즉 캐노시스사상에도 위배되며 교권주의가 지닌 위험성은 역사가 이미 증언하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그 둘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두 권위의 체계인 교회와 사회의 역설적 관계에서 역사 너머의 구원만을 바라보고 현재 인내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자칫 크리스천의 책임 영역을 교회 안으로만 가두고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입장은 타락한 인간 본성이 반영된 사회와 문화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든지(첫번째 입장) 그저 초역사적 구원만을 바라고 인내하는 것(네번째 입장)이 아닌, 교회가 사회와 문화 속에 뿌리내린 악의 요소를 복음의 정신으로 기경(起耕)하는 자세입니다.미래적 구원도 중요하지만 당장 현재적 갱신이 더 시급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섯번째 입장을 지지합니다.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을 담은 휘튼 선언, 로잔 언약, 그리고 그랜드래피즈 보고서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한결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21세기는 가속적 사회 변동으로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교회 안팎의 도전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경계는 건물과 그 담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정체성과 그것의 실천에 있습니다. 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상생하되 복음의 정신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헛된 세속적 가치를 혁파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변혁하는 그런 자세가 요구됩니다. 복음의 정신이 무엇이냐는 개인마다 교파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겠지만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땅으로 하강(下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의 정신과 섬김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은 권력과 이윤과 쾌락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에는 그것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는 초월적 가치의 영역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월적 영역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에 쉽게 동화되어 덩달아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게 됩니다. 나눔, 돌봄, 섬김, 생명, 평화, 그리고 구원을 선포하고 그것들을 복음의 정신에 담아 실천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초월적 영역에 서서 묵시적 비전으로 잘못된 문화와 불의와 반복음적 풍조를 사회로부터 추방시켜 나가야 합니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앨런 뵈삭(Allan Boesak)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불의가 자행되는 거리를 거닐면서, 거짓이 횡행하는 세상에 살면서 응당 표현해야할 ‘거룩한 분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못된 사회 질서를 하나님의 의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세상은 동료의식을 느껴 교회를 무척 반길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2천여 전에 세속화된 교회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교회가 세속적이고 악한 가치를 변혁시키지 않으면 결국 교회는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그 속에 함몰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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