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이 있는 11월이 돌아 왔다. 추수감사절에는 의례 최초의 추수감사절 이야기가 회자(膾炙)된다. 1620년 9월, 102명의 승객을 태운 메이플라워 호가 영국의 작은 항구 플리머스(Plymouth)에서 출항하였다.

메이플라워 호는 불행히도 폭풍을 만나 거의 한 달을 향방 없이 헤매다, 그 해 성탄절을 며칠 앞둔, 12월 21일 이름 없는 작은 해안에 닻을 내렸다. 이 곳 이름을 자기들이 출항한 영국의 플리머스 항의 이름을 따 플리머스라 명명하였다. 대체로 미국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 역사는 그보다 반 세대 전인 16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7년, 오늘의 버지니아에 최초의 영국 이민자들이 도착하여, 영국 왕 제임스의 이름을 딴 ‘제임스타운’이라는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정착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가 어찌 영국인들의 신대륙 도착과 개척에서 시작했으랴.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건너오기 수천년 전 신석기 말기 이전부터 이미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고이 간직하면서 살아오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는 모름지기 아메리칸 인디언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금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필자는 신대륙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35명의 청교도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메이플라워 호에 탑승한 성인 남자들이 신대륙을 눈앞에 두고, 협약을 하나 체결했는데, 이것이 바로 ‘메이플라워 협약’(Mayflower Compact)이다. 왕이 지배하던 영국을 떠나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물론 통치자가 없었다. 영국에는 왕과 귀족들이 다스리는 정치 체제와 왕족, 성직자, 귀족, 평민, 하층민이라는 사회적 신분 계급이 있었으나 신대륙에는 왕도 귀족도, 그 어떤 지배체계도 사회 계급도 없었다. 따라서 새로 건설될 이민 사회를 이끌고 갈 지도체계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이 협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미국 정치체제를 규정한 모태이다.

이 협약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혁명적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주민이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내용이다. ‘지도자’(leader)라는 말은 지배자(ruler)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생소하고 낮선 단어였다. 인류는 그때까지 지도자가 없었고, 오직 지배자만 있었을 뿐이었다. “왕권은 신으로부터 나왔다”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은 인류 공통의 지배 형태였다. 왕이 지배하고, 그가 죽으면 세자가 그 뒤를 이어 왕권을 받아 통치하는 것이 이전 시대의 통치 체제였다.

그러나 이 협약은 왕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지도하는 자를, 그리고 그 권력은 세습하는 게 아니고 선출한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 이들은 존 커버(John Corver)를 그들의 지도자(총독)로 선출하였다.

선출하는 정치체제, 이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민주주의 정체를 채택하는 나라의 헌법 1조가 바로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이 말 한마디를 쟁취하기 위해 인류는 긴 세월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헤아릴 수 없는 투사들이 피를 흘려야만 했다.

또한 이 협정에서 선출된 자의 공직 재임 기간은 일정하게 규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주민에 의해 선출된 사람이라도 종신토록 재임할 수는 없었다. 왕은 임기가 없고 죽을 때가지 집권한다. 그러나 선출직은 일정 기간의 임기가 규정되어 있다. 메이플라워 협정에는 기간(term)을 두었다. 일정 기간이 되면 주민들에 의해 다시 그 재임 여부를 묻거나 새로 선출하도록 했다.

이것이 두 번째 중요한 요소이다. 그 누구도 한번 선출되었다고, 죽을 때까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는 규정이다. 그 기간이 길 수는 있어도 종신일 수는 없다. 미국 대통령의 임기가 4년, 하원의원이 2년, 그리고 상원의원은 6년으로 못박혀 있다. 대통령은 두 텀 이상 할 수 없다는 불문율도 있다. 메이플라워 협정에서 비롯된 미국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정치 체제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 역사의 역설이 있다. 청교도들은 영국이 자국민들에게 영국교회(성공회)를 강요하고, 국교회를 믿지 않은 주민들을 박해하는 와중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진출했다. 즉 신앙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찾아 죽음을 감내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기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안정된 삶을 이룬 후부터, 그들의 주 거류지였던 메세추세츠 주에 청교도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거주권을 박탈하고 추방하였다. 로마 가톨릭은 말할 것 없고, 침례교도나 퀘이커 같은 소종파들의 신앙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을 내어 놓고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로드 아일랜드나, 펜실베니아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청교도들은 분명히 신대륙에 자기들의 신앙에 따라 자유로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신성한 사회를 건설하려 분투했지만, 타 종파에는 이런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는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비로소 “각인은 각인의 신앙양심에 따라 신앙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가 확보된다”라고 규정했다. 인간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또 다른 역사의 단면을 보여 준 사례이다.

다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청교도들이 최초의 감사절에 행한 일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죽음 같은 첫 해 겨울을 나는 동안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거처할 텐트를 쳐 주었던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같이 음식을 나누고, 운동경기를 하면서 친교를 나누었다.

이 일은 종족, 피부색, 언어, 문화, 성별, 전통의 장벽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누구나 동일한 자유와 권리를 갖는다는 위대한 정신의 발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감사를 할 때는 내가 사는 세상이 차별 없는 곳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이다. 우리 모두 이런 세상이 오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여 진정한 감사절을 맞이할 때를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