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저녁에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주제로 목자 훈련을 하는데 한 집사님께서 “건빵은 빵일까요? 비스킷일까요?” 물으시는 겁니다. 몇 사람은 빵이다, 몇 사람은 비스킷이다,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질문한 집사님의 대답은 “건빵은 빵입니다. 아무리 딱딱해도 이스트가 들어 갔으면 빵이고, 베이킹 소다가 들어가면 비스킷입니다”였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이시니 맞겠지요.
이번에는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떡과 포도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성만찬에서 말하는 빵은 Daily bread이니까, 우리 말로는 떡보다는 밥이 낫지 않을까요?” 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컷 웃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단이 나뉘고 분열이 생긴 것은 말씀에 대한 해석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성찬에 대한 해석과, 세례에 대한 해석 때문에 의견이 나뉘면서 교회가 나뉘고 교단이 나뉘었습니다. ‘세례는 침례가 맞다, 뿌리는 세례가 맞다’ 해석상의 갈등으로 교단이 나뉘었습니다. 초대교회 문서에 ‘열두 사도들의 전승’이라는 책을 보면 ‘흐르는 물이 있으면 흐르는 물에서 침례를 하라. 그러나 흐르는 물이 없으면 물이 있는 곳에서 침례를 하라. 침례를 할 수 없으면 물을 머리에 뿌려 세례를 주라’고 나와 있습니다. 꼭 침례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뿌리는 세례가 맞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가 중요하지, 엉뚱하게 교리에 대한 해석으로 교회가 나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찬에 대한 해석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화체설이라고 하여, 빵과 포도주에 예수의 몸이 실재적으로 임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공재설이라 하여 예수의 몸이 임하기도 하지만, 빵과 포도주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존 칼빈은 영적 임재설이라고 해서, 영적인 의미이지 실제로 예수의 몸과 피가 임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츠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여 성찬을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기념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적어도 개신교는 성찬이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그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해석의 차이에서 교단이 나뉘었습니다.
사실 세례와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과 하나되고, 예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하나되는 연합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런데, 세례와 성찬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서 교단이 나뉘고 교회가 나뉜 것은 정말 아이러니입니다.
왜 개신교는 수많은 분열을 거듭한 것일까요?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입니다. 가톨릭에 반대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용납하지 못합니다. 또 개혁(Reformed)되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더 강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계속 교회 안에는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사제, 주교, 교황이 결정을 내리면 그것으로 해결됩니다. 물론 마음 속까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교리에 있어서 사제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교리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분명한 해결책이 제시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아무도 사제의 행보에 제동을 걸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개신교는 말씀만이 교리와 교회의 원칙이라는 주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와 성찬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이듯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어느 한 사람의 주장만을 따를 수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의견이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생각은 분명 건전한 생각인데, 교회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중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작금의 교회 세습 문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입니까? 한 교회를 수십년 목회한 목회자에게 같은 교회에서 직언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99%가 복음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는다면 99%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1%에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이 아닌 해석상의 차이라면 얼마든지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말을 역으로 세습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니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복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누가 교회를 지킵니까? 주님이 지킵니다. 누가 교회를 분열케 합니까? 사람입니다. 겸손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때입니다.
이번에는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떡과 포도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성만찬에서 말하는 빵은 Daily bread이니까, 우리 말로는 떡보다는 밥이 낫지 않을까요?” 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컷 웃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단이 나뉘고 분열이 생긴 것은 말씀에 대한 해석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성찬에 대한 해석과, 세례에 대한 해석 때문에 의견이 나뉘면서 교회가 나뉘고 교단이 나뉘었습니다. ‘세례는 침례가 맞다, 뿌리는 세례가 맞다’ 해석상의 갈등으로 교단이 나뉘었습니다. 초대교회 문서에 ‘열두 사도들의 전승’이라는 책을 보면 ‘흐르는 물이 있으면 흐르는 물에서 침례를 하라. 그러나 흐르는 물이 없으면 물이 있는 곳에서 침례를 하라. 침례를 할 수 없으면 물을 머리에 뿌려 세례를 주라’고 나와 있습니다. 꼭 침례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뿌리는 세례가 맞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가 중요하지, 엉뚱하게 교리에 대한 해석으로 교회가 나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찬에 대한 해석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화체설이라고 하여, 빵과 포도주에 예수의 몸이 실재적으로 임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공재설이라 하여 예수의 몸이 임하기도 하지만, 빵과 포도주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존 칼빈은 영적 임재설이라고 해서, 영적인 의미이지 실제로 예수의 몸과 피가 임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츠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여 성찬을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기념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적어도 개신교는 성찬이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그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해석의 차이에서 교단이 나뉘었습니다.
사실 세례와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과 하나되고, 예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하나되는 연합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런데, 세례와 성찬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서 교단이 나뉘고 교회가 나뉜 것은 정말 아이러니입니다.
왜 개신교는 수많은 분열을 거듭한 것일까요?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입니다. 가톨릭에 반대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용납하지 못합니다. 또 개혁(Reformed)되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더 강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계속 교회 안에는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사제, 주교, 교황이 결정을 내리면 그것으로 해결됩니다. 물론 마음 속까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교리에 있어서 사제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교리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분명한 해결책이 제시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아무도 사제의 행보에 제동을 걸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개신교는 말씀만이 교리와 교회의 원칙이라는 주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와 성찬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이듯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어느 한 사람의 주장만을 따를 수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의견이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생각은 분명 건전한 생각인데, 교회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중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작금의 교회 세습 문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입니까? 한 교회를 수십년 목회한 목회자에게 같은 교회에서 직언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99%가 복음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는다면 99%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1%에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이 아닌 해석상의 차이라면 얼마든지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말을 역으로 세습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니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복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누가 교회를 지킵니까? 주님이 지킵니다. 누가 교회를 분열케 합니까? 사람입니다. 겸손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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