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 타락한 인간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의 존재로 변화되는 것 이상의 기적은 없다. 구원 자체가 기적으로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적을 믿는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요구하시는 믿음의 수준은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는 기적을 믿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기적을 믿는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동일한 것 같으나 차이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기적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것을 이 세 청년이 보여 준다. 다니엘 세 친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이 불속에서 구원하실 수 있으심을 우리는 확신한다. 기적을 믿지만 우리의 믿는 바와는 달리 우리를 고통의 불길 가운데서 건져 주시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기적 이상의 믿음을 보여준다. 기적을 못믿는 믿음도 있지만 우리의 믿음은 기적을 믿는 것은 물론 기적의 유무를 초월하여 신뢰하는 불변의 믿음이어야 한다. 기적을 뛰어넘는 기적 이상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마가렛 리라는 여인의 믿음만큼 도전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녀는 수줍음이 많고 친절한 성격이지만 의지가 강하고, 표정이 진지하며, 눈빛이 살아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3년전에 갑자기 인후암 선고를 받았다. 식도에서 전이된 암세포가 서서히 마가렛의 목숨을 조여가고 있었기에 의사들은 음식물을 삼킬 수 있도록 그녀의 목에 튜브를 삽입했다. 그러나 그 튜브는 암세포의 압력 때문에 수축되고 말았다. 의사들은 다른 튜브를 삽입하려 했으나 마가렛은 거부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저는 죽는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목이 이런 식으로 막혀 버리는 것은 싫습니다.”라고 말했다. 문병 온 사람들은 그녀의 참담한 상황을 보고 악의는 없으나 상처될 수 있는 동정의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암의 두려움과 말의 상처를 잘 이겨 나갔다. 그녀의 일기에는 도전을 주는 용기있는 믿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나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니까요. 암세포는 사랑을 무력하게 할 수 없고, 소망을 꺾어버릴 수도 없으며, 믿음을 앗아갈 수도 없고, 평안을 사라지게 할 수도 없고, 신뢰를 망가뜨릴 수도 없고, 우정을 박살낼 수도 없고, 추억을 내쫓을 수도 없고, 용기를 무너뜨릴 수도 없고, 성령을 억누를 수도 없고, 예수님의 능력을 업신여길 수도 없지요.” 얼마나 멋진가? 암세포가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암이 범할 수 없는 수많은 가치들을 용기있게 말하고 있다. 말도 잘할 수 없고 먹는 것도 불편했고, 고통은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혔지만 암세포조차도 마가렛의 정신만큼은 소멸시키지 못했다. 겉만 보면 인간의 말로가, 하나님의 능력이 이만큼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할지 모르나 그녀의 삶과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믿음의 능력이 확실히 증거되는 계기가 되었다.

솔직히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는 우리가 당하는 역경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상황을 벗어나 보겠다는 목적을 갖고 하는 기도일 때가 많다. 문제 해결을 원하는 것이 잘못 됐다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바는 그 차원을 넘는 믿음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통의 상황을 벗어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갈망하며 고난과 당당히 맞서는 의연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그로인해 많은 사람에게 도전을 주고 변화된 삶을 살게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인생에서 겟세마네와 골고다만을 제거해 버릴 수는 없다.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할 때 부활에도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경과 아울러 순경을 주시고, 때리기도 하시고 싸매기도 하신다.

고난이 죄인된 인간에게 필연적인 문제가 되었지만 누구나 고난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시련을 기뻐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시련이 닥칠 때 놀라지 말아야 한다. 암으로 죽어가던 신학자 앨런 루이스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고통스런 모습을 떠올리며 “하나님은 인간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저주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가 참으로 완벽하고 준엄하며 단호하지 않은가.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에 질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타락한 이후에 질병이 왔지만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경우도 있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계21:4)에 이르기 전까지 이 땅에 있는동안 병들어 아플수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고, 천재지변을 당할 수도 있다.

반면에 기적이 일어나는것도 일상에서 볼 수 있다. 기적같이 죽을 병이 낫기도 하고, 절망적인 사업이 회생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며,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던 베드로의 기적이 오늘 날 일어나기도 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만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기적이 안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다. 기적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 문제가 해결되느냐 안 되느냐를 넘어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냐가 우리의 관심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에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11:6)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기적을 허락 하실 때마다 믿음을 요구하신 예수님을 기적에 관계없이 신뢰하고 그분의 영광이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사람이 응답에 관계없이 축복받은 사람이다. 믿음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가 좌절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황은 우리의 기대를 초월하고도 남는 기적 이상의 믿음을 만들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