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을 살아오면서 나의 행동양식에 가장 도드라진 것 중에 하나는 눈치보기이다. 아마도 눈치보기의 시작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형제들, 그리고 친구로 점차 나와 관계된 모든 영역에서 마치 전방위를 카버하는 레이더처럼 작동하였다.

눈치는 양면성이 있다. ‘눈치없는 자’란 대부분 욕으로, 사회인으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가 되는 까닭에 대부분 주변인으로 홀대를 받는다. 저들중에는 태생적으로 순진함 때문에 그리된 자도 있지만, 대부분 이기적 삶의 태도가 도무지 눈치 없는 짓을 태연자약하게 하다가 결국 도태되는 아픔을 자초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지나치게 눈치 보는 자이다. 이들 그룹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먼저 약삭바르기 이를때 없는 눈치를 천부적으로 소유하여 기가막히게 살아남는 부류이다. 저들은 적과 아군간에 피아식별이 어려운 때에도 동물적 감각으로 눈치 레이더를 작동 시키는 덕에 출세가도를 질주한다. 그런데 또 한그룹은 비열할 정도로 눈치보는 체면불구형, 얼굴화석형이 있다. 이들은 하도 손울 잘 비벼서 자신의 안위를 구축하는 필살기로 사용하는 까닭에 비웃음거리가 되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유형에도 속하지 못한 어정쩡한 눈치로 이만큼이나 버텨왔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

신대원에서 교회사 전공을 꿈꿔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경건주의가 끼친 한국 대학생선교운동" 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주임교수의 눈에 들었지만 그에게 교회밖선교운동(Parachurch movement)에 대한 이견으로 눈치없이 대들었던 까닭에 세속말로 짤렸다. 틈을 비집고 들어온 동기가 그의 수족이 되더니 결국 삼십년후에는 총장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 이런것을 두고 "잘한 눈치 하나 총장을 보장한다' 라고나 할까! 또 한번은 상승기류의 이민목회속에 욱! 하는 성질 하나로 눈치없이 불쑥 내던진 한 마디가 쪽박을 차게되었다. 이후 회복없는 목회를 충성하나로 버텨왔지만 그 눈치없었음을 한하고 았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재기발랄한 눈치로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고 다듬어서 목회 성공을 일구어 냈다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도 사람 눈치보는 것보다는 하나님 눈치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눈치를 100% 보면서 살았다고 자신하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그리 살려고 무진 애를 쓰기는 썼다는 것이다. 하나님 눈치 보랴! 사람 눈치보랴! 등이 휘여지는 목회 후배들에게 던지는 충언이 있다면 그래도 목사로서는 하나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라고 감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