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누가 있건 상관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는 핑계로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해도 공동체가 좋아하지 않으면 옳은 일도 눈치를 보게 합니다. 아무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바르고 진리라 해도 가족이나 친구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으면 관계가 흠집날까 슬그머니 주변에 무쳐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해야 합니다. 분위기나 환경 때문에 바른 것이, 정의가 감추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일시적으로 분위기 유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그 공동체와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곳에서도 자신의 뜻과 옳음을 위해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여러 차례 실력 있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음식를 대접하며 만남의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호의적인 모습도 보이지만 내심은 책잡을 일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한 지경을 만들 수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해 그들의 초미의 관심사인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것도 사랑이신 예수님 앞에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두고 말입니다.

이미 ‘고창병(dropsy)’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예수님 앞자리에 앉혀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니 그것이 옳은 것이 되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교묘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교묘히 만든 자리임에도 살짝 눈치 보고 환경 봐서 치료는 다음에 하고 지금은 분위기 맞추다가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지 않으신듯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책잡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아셨고 그 명제를 다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합당하냐?”는 질문을 던지시고 환자를 치료하여 보내십니다. 그리고는 더 확실하게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고 끌어내지 않겠느냐?”(눅14:5)는 말씀으로 책잡히는 것을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이런 모습도 있습니다. 포로 귀환 후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위해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도 그를 미워하는 무리가 산적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모함하고 협박하며 만나기를 종용했습니다. 그를 해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믿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중단없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결국 아무도 해 낼 수 없는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52일 만에 성벽을 완벽히 재건해 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칫 지켜내고, 싸워야 할 것이 진리이건 정의이건 주변 환경과 발맞추기 위해 양보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고집불통’, ‘ 꽉 막힌 사람’쯤으로 치부해 버리려고 합니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분명한 옳고 그름 위에 눈치 보지 않고 사랑을 행하는 자들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진리를 지켜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kisung
Sep 16,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