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아버지, 사춘기 소녀의 방황 이란 짧은 말로 표현하기엔 이 영상이 주는 감동은 너무 깊다. 특히 마지막 영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말 못하는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에 투영된다. 때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통해, 2천년 전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는 성령에 힘입은 수많은 제자와 그리스도인을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자녀들을 향한 사랑을 알리길 원하신다.
누가 기독교인은 탕자가 될 수 없다 했는가?
우리는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기보다 때로 주어진 환경을 탓하고, 실패와 좌절에 무너지며 하나님을 오해한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 ‘재산 중에 내 분깃을 주소서’ 하며 떠나는 탕자로 하나님 앞에 선다. 탕자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재산으로, 세상적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임을.
현대 교회에도 세상의 성공주의, 물질주의가 깊숙이 침투해 있다. 한 가지 예로, 교회가 크면 성공한 목회가 되는 것처럼, 더 큰 교회를 위해 달려가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큰 교회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큰 교회=성공’이란 세상적 가치관이 들어와버린 단면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목소리에 떠내려가는, 그래서 생명을 죽여 ‘생명을 살리신’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세태 그리고 안타까운 자화상이 이 영상으로 떠오른다.
한국은 2000년도 이후 한 해 15,000여명이 자살하는 자살 강국이다. 하루 평균 42명이 자살, 70~80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 청년들의 경우는 자살로 죽는 수치가 교통사고의 2배로 사망 원인 1위에 달할 정도다. 극단적인 예지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방황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메는 가를 보여주는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이들이 생명을 끊을 만큼 절망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들을 일으켜 세울 힘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 영상에서 답을 발견한다.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겉 모습만 바라봤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절망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했을 때 딸의 뺨에서 치유의 한 방울 눈물이 흐른다. 사랑은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것임을, 자신의 가치는 아버지의 생명과 같음을, 그 때서야 깨닫는다.
기독교의 진리는 이성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 예수님은 진리를 구하는 이성적인 헬라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복음 12:24~25)”
한 때 탕자였고,그 분의 사랑을 깨달은 우리는 이제 환경과 세상적 잣대에 휩쓸리지 말고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생명은 생명으로 통한다.
지금도 가슴을 치며, 죽어가는 영혼을 안고 도움을 줄 한 사람을 찾는 이 아버지께 손을 내미는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Hey Tube]는 유투브에 있는 영감을 주는 영상에 대한 기독교적 묵상을 실은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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