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기질이 다릅니다. 기질에 따라서 느긋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실제로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두려움과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도 몇 분의 교우들을 만나면서 염려와 걱정에 잠겨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정말 해결이 쉽지 않은 어려움이 분명합니다. 답답한 마음을 안아야만 하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무 염려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빌립보서 4:6,7). 예수님께서도 염려는 이방인이나 하는 것이라며 염려를 중단하라고 명하십니다. 성경의 권면은 현실적인가요? 무슨 뜬구름 잡는 식의 내용만을 전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성경은 그만큼 우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기에 그런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해 봤자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정지시킬 수도 없습니다. 날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통제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마저도 우리 마음대로 자라게 하거나, 성장을 둔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어쩌면 이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을 호소하는 영혼의 안타까운 외침이 아닐까요?

동시에 염려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프랑스 소설가이자 비행사로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을 추구했던 생떽쥐페리가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8,000피트 상공에서 어둠이 깔린 지상을 내려다본 적이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불빛들이 보이기에 그는 그 불빛들을 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저 조그마한 빛 안에 염려도, 고민도, 즐거움도, 기쁨도, 슬픔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고민도 산 자가 가진 특권이 아니더냐? 또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 아니더냐?” 생떽쥐페리의 중얼거림처럼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삶에서 다가오는 여러 가지 고민을 마냥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우리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숨결을 지금도 내뿜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염려거리가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전혀 염려가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수천 년 동안 변화가 없는 바위에게는 염려나 고민이 없습니다. 또 개펄에서 쉴 틈없이 시달려야 하는 갯벌 생물에게도 염려와 고민은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알고, 변화를 느끼고, 반성할 줄 알고, 자기의 죽음을 의식하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에게만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는 바로 산 자의 특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염려 자체를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특권을 잘 이용하면 창조적 발전의 디딤돌이 되지만 남용하면 말할 수 없는 절망을 자아내기에, 산 자가 가진 염려라는 특권을 슬기롭게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먹기가 중요합니다. 염려거리를 좋은 관점을 가지고 대하십시오. 나를 염려하게 만드는 내적, 외적 요소들이 그저 나쁜 이유로 우리를 찾아온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치밀한 주도함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염려거리가 찾아 왔기에 인생은 도전의 가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염려거리로 인해 삶의 의미가 만들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