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는 나이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십 대 이전의 자녀는 아빠 말은 다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우리 아빠가 그랬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말을 진리인 줄로 믿습니다.

십 대가 되면서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이 틀릴 때가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말이 다 맞지 않기도 하지만, 사춘기이다 보니 아버지의 말씀에 항상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이십 대가 되면 아버지는 자기들보다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자녀가 대학에 가고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접하다 보니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못 보내는 아버지,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아버지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가르치려고 하지요. 어떤 아버지는 집에 전화했는데 아들이 받아서, 어려워서 한마디도 못하고 끊었답니다.

자녀가 삼십 대가 되면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지식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모르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세월을 먼저 살아온, 자녀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말은 다 옳은 것입니다. 그러면 십 대, 이십 대에 방황했던 것을 후회하고 아버지를 생각하고 배려하기 시작합니다. 사십 대가 되면 아버지 말은 무조건 옳 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기계적인 동의가 아니라 인격적인 동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고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오십 대가 되면 아버지께 묻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먼저 아버지와 상의합니다. 효(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출세, 입신양명도 부모에게 효라고 하지요. 그러나 효 중의 최고는 ‘양지(養志)’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효 중의 효입니다.

이렇게 부모의 뜻을 헤아리는 자녀는 먼저 부모님께 뜻을 여쭙니다. 오십 대가 되면 자녀들도 세상 지식과 지혜에 능통하게 됨에도 먼저 부모님께 묻습니다. 별 쓸데없는 일들조차도 묻습니다. 육칠십 대가 되면 대부분 부모님이 천국 가시고 안 계십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옆에 계시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이 철이 든다는 것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탕자가 조금 배고팠을 때는 돼지의 쥐엄 열매를 찾았다. 정말 배고팠을 때는 아버지를 찾게 되었다.” 명언이지요. 우리가 조금 배고프면 이런 저런 인간적인 방법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 인생의 위기가 닥치면 누구든지 아버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원하십니까? 선물을 원하십니까? 지금 기도하는 이유가 선물을 받고 싶어서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버지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