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지변을 가장 빨리 알아내는 것이 곤충들인 걸 아십니까? 곤충들의 이동을 보면 어디서 비가 오고 태풍이 부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같이 ‘기상위성’을 쏘아 올리고 최첨단 시설들로 일기 예보를 하는 때에도 몇 나라에서는 지금도 ‘동물감지시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 예가 ‘두꺼비’는 지진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한다고 합니다. 2008년 ‘쓰촨성 지진 때’ 이미 수십만 마리가 이동을 시작해 그 도시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뱀은 120Km 밖의 지진파를 느낀다고 합니다. 겨울잠을 자다가도 지진파를 느끼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물감지시설’에서 많이 쓰인다고 합니다. 뿐 아니라 ‘새’ 중에 ‘카나리아’는 민감하여 ‘무색무취의 독’을 쉽게 파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과 미국에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명 지킴이’로 쓰인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신기할 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피해들 가는지…
우리 주님은 인간에게도 어느 동물 못지않은 ‘감지시스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에서 구름이 일어나면 소나기가 오리라, 남풍이 불어오면 더울 것이라.” 안다 했습니다. 실례로 사람들은 자연 현상들을 보면서 앞으로 일어날 위험들을 알아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위대한 ‘감지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은 상실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다.’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걸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모르기 때문에 멋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 인 줄 알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리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의지나 판단’을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 선생들에게 넘겨주고 살았습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저 모르는 척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꼭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시대적 징조’들이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고, 얼마나 비신앙적이고, 반인륜적인 일들이 ‘그때’를 더욱 앞땅기고 있는데 우리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들리는 양심의 소리, 들리는 신앙의 소리, 들리는 복음의 소리를 세상의 권력과 유행과 부와 명예를 탐하는 자들의 소리로 대체하려 합니다.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젠가 아무것도 가릴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그때를 예비하며 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날이 ‘내일’이 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는다고 말입니다. 이제 그 주님을 찾으셨다면 마지막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당신의 악행을 송사하고 재판장이 당신을 옥에 가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생기기 전에 당신은 오늘 천기를 읽으며 형제와 화목을 추구하는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kisung
Jul 22, 2012
그 예가 ‘두꺼비’는 지진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한다고 합니다. 2008년 ‘쓰촨성 지진 때’ 이미 수십만 마리가 이동을 시작해 그 도시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뱀은 120Km 밖의 지진파를 느낀다고 합니다. 겨울잠을 자다가도 지진파를 느끼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물감지시설’에서 많이 쓰인다고 합니다. 뿐 아니라 ‘새’ 중에 ‘카나리아’는 민감하여 ‘무색무취의 독’을 쉽게 파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과 미국에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명 지킴이’로 쓰인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신기할 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피해들 가는지…
우리 주님은 인간에게도 어느 동물 못지않은 ‘감지시스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에서 구름이 일어나면 소나기가 오리라, 남풍이 불어오면 더울 것이라.” 안다 했습니다. 실례로 사람들은 자연 현상들을 보면서 앞으로 일어날 위험들을 알아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위대한 ‘감지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은 상실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다.’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걸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모르기 때문에 멋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 인 줄 알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리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의지나 판단’을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 선생들에게 넘겨주고 살았습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저 모르는 척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꼭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시대적 징조’들이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고, 얼마나 비신앙적이고, 반인륜적인 일들이 ‘그때’를 더욱 앞땅기고 있는데 우리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들리는 양심의 소리, 들리는 신앙의 소리, 들리는 복음의 소리를 세상의 권력과 유행과 부와 명예를 탐하는 자들의 소리로 대체하려 합니다.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젠가 아무것도 가릴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그때를 예비하며 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날이 ‘내일’이 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는다고 말입니다. 이제 그 주님을 찾으셨다면 마지막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당신의 악행을 송사하고 재판장이 당신을 옥에 가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생기기 전에 당신은 오늘 천기를 읽으며 형제와 화목을 추구하는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kisung
Jul 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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