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1~15

사도행전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하나님의 은혜와 택하신 백성을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지체로 헌신 봉사하게 하며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한 보혜사 성령의 임재에 대한 너무나 확실한 증거입니다.

1. 성령에 사로잡힌 베드로와 요한

사도행전 2:1~3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에게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 베드로와 요한도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신도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지 알아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고전2:12~13)

고린도전서 2:10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니라”하셨으며 요한복음 16:7~8에는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인간의 죄와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의 복음을 깨닫게 하심으로 세상에서 구원 얻는 성도가 많아지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13:5에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성령으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직분 여하를 막론하고 성령(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에 있음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8:9~10에서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하셨음을 유념하고 각자 자기가 성령을 받았는지, 그 성령께 이끌리며 쓰임 받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내 신앙생활이 베드로와 요한처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끌리며 얼마나 순종하며 요긴하게 쓰임 받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는“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셨으며 “성령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증거”(롬8:16)하신다고 하셨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너희와 함께 영원토록 있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성령은 영생의 보증으로 임하신 것(요14:16)입니다.

2. 성령의 지시에 의한 사역

본문 3:1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받은 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현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주목하게 됩니다. 앉은뱅이라는 신체상의 불구를 빌미로 성전 미문에 앉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종교심리를 기대하며 구걸해 온 앉은뱅이를 이전에도 여러차례 보았고 또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날 특별히 그 앉은뱅이를 두 사도가 주목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그 앉은뱅이를 고치게 하셔서 복음의 위력을 확증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가 미문에 앉아 구걸해 온 세월이 40여년(행4:22)이나 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 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미문 앞의 앉은뱅이를 모르는 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40여년이나 된 앉은뱅이를 두 사도를 통한 성령님의 능력으로 일으키사 예루살렘 교회 부흥의 기폭제로 삼으셨고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성령의 무한하신 능력의 증인이 되어 선교확장의 사명을 계속 잘 감당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신도 중 스스로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고 혼돈하여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성령의 사람으로 알려진 바울 사도께서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마가 요한)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이 일로 감정이 격해져 기도도 하지 않고 임의로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했으나 성령이 막으셨고 다시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성령)이 허락지 않으십니다. 비로서 그날 밤 기도하던 중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가서 루디아를 만나 유럽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지시를 따라 쓰임 받는 것이 사역자의 길입니다(행16:6~15).

하나님은 때가 차면 그 정하신 경륜을 따라 사람을 택하시고 구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역자와 타이밍을 맞추어 역사하십니다.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신체적 불구나 기타 문제로 인해 고통과 절망에 시달리는 어떠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어 그 어떠한 불행도 다행으로 변화시키시는 복음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성령의 역사는 복음확증(福音確證)을 위한 것

본문에서 사도들이 행한 이적을 통해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매 많은 백성이 크게 놀라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인기가 고조되면서 베드로는 자신을 주목하는 분위기를 부담스럽게 느끼며 앉은뱅이가 나은 것은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가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 나타난 결과이며 앉은뱅이를 고치신 이는 자신들이 아니라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을 수 있는 복음을 애써 확증했습니다.

작금의 한국 교계(교회나 기도원 등)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축사(逐邪)나 병 고치는 일로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자기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한 것인양 자기 자랑을 하고 돈을 받아 챙기는 것은 참으로 앞이 캄캄하고 기가 막히는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성령)을 주시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도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하셨으니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결 받은 결과는 몽땅 주님께만 영광 돌려져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성령님의 능력을 이용한 잘못된 사기행각과 같은 소문들을 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두렵지도 않은가 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끝까지 자기들에게로 향하는 기대와 인기를 물리치며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만을 확증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이 모습에서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각오가 무엇인지 깨닫고 선교 사역에 더욱 새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사를 통해 확증된 바와 같이 믿음의 선배들은 자기 믿음을 지키기 위해 또는 선교확장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헐벗고 굶주림은 물론 매를 맞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며 온갖 고문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함이 없이 재산과 생명까지 빼앗기면서 낙심하거나 변절하지 않고 베드로전서 4:12-14와 같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늘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라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하심을 믿어 위로와 큰 담력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하신 히브리서 11:24-26 말씀과 달리 오늘의 한국교회는 십자가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믿음은 만나보기 어렵고, 언제부터인가 경제 부흥의 영향을 받은듯 신앙마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이 세상의 허황된 꿈에 빠져들어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타락하고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예수님의 이름을 파는 현대판 가룟 유다가 있는가 하면 성령의 능력을 악용하며 사기행각을 일삼는 잘못된 일부의 모습도 있습니다. 과연 한국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두렵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베드로전서 5:1-4에 “너희 중 장로(목회자)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

이것을 명심하며 진리정통하고 성령충만하여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사도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는 말씀을 본받읍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명분이나 이권을 탐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리 위에 바로 선 믿음, 성령충만하여 우리 스스로 복음의 제물되기를 힘써 내 가정, 내 교회부터 바로 세우고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 얻게 하여 굶어 죽는 수가 늘고 있다는 북녘의 불쌍한 동족을 구원하고 그 여세로 세계 선교에 힘써 인류 복음화를 앞당겨 드리는 성령충만한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