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봄 미국 캘리포니아와 뉴욕 등지에서 백인 교회와 한인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했을 때 백인 교회의 18세 된 소녀가 벙어리이고 눈 뜬 장님이었는데, 은혜를 받고 안수 기도 시간 눈도 뜨고 말도 했다. 부흥회가 끝나는 금요일 밤이어서 주님이 이 같은 이적을 행하사 큰 은혜로 부흥의 기폭제가 되게 하셨다.


집회 후 사례금을 받지 아니하니까 이스라엘 성지순례 티켓을 준비해 주었다. WTA 여객기 편으로 프랑스의 파리를 거쳐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 도착했다. 아침에 식당에서 한국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 에는 목사님도 네 분, 장로님 두 분, 권사님이 열 여섯 분 그리고 전도사님과 안수 집사님도 있었다. 합하여 26명이 같은 여행그룹이었다. 그 중엔 캘리포니아에서 부동산 부자로 알려진 소니야 석 권사님도 있었다. 남미의 브라질 상파울로에서도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이 함께 하셨다.

성지 순례 중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 어머니이신 헬렌 여사가 세웠다는 산상 보훈의 기념각에서 내게 설교를 하라 하기에 즉석 설교를 했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모두가 눈물로 감동적인 은혜를 받았다고 했다. 그 이후 예수님의 행적지에 가면 으례히 설교 요청을 했고, 급기야는 저녁 식사하는 식당을 미화 100불씩을 주고 밤 10시부터 찬양과 설교, 기도회를 가졌다.

22일간을 동행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정이 깊어졌다. 끝내고 헤어질 때 브라질에서 오셨다는 H 장로님이 내게 연락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달라했고, 일년 쯤 지나 4월에 상파울로에 와서 부흥회를 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1984년 4월 23일, 남미 선교차 방문했다. 서머나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그 지역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면서 앵콜 집회를 하면서 여러 교회가 함께 모여 은혜를 나누었다. 그 때 그 지역의 동포들은 오리엔떼 시장가게 100여개 중 800여개 이상을 점유하고 주로 남녀의 상하의(셔츠와 반바지)를 만들어 남미 전역에 보급한다고 했다.

그 곳에 이민 온 한국 사람들은 3년 안에 가게를 사게 되고, 5년이면 맨션 아파트를 살 만큼 부지런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셨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한국 사람들의 가게를 셔터를 부수고 차 까지 들이대고 원단과 의복, 기계들(재봉틀 류)까지 다 싣고 간다는 것이다. 이 같이 한국 사람 가게를 털게 되는 이유로는 이민 온 한국 사람들이 브라질 원주민들 보다 좋은 집에 살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벤츠 같은 차를 타면서 너무 잘 사는 데 대한 질투와 브라질에서 번 돈을 브라질에 전혀 환원하지 않고 그 돈으로 미국에 투자 이민을 간다는 데 상대적 배신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곳 집회를 통하여 은혜 받은 성도들에게 호소하기를 우리 동포들이 지구 반대편 수 만리 낯선 이 곳에 와서 정착안주(定着安住) 할 수 있게 된 것은 브라질 정부와 국민들의 보살핌과 협조가 있었기 때문임을 깨달아 그 감사례로 재고품 옷들을 모아서 여러 도시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과 정성의 선물로 전달하면 이민 온 한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 아니겠는가 했더니 뜻밖에 일만 벌이 넘는 옷 들이 모였다.

여러 도시를 전도집회 하며 그 옷들을 나누어 주었다. 이 같은 일들이 기자들에 의해 뉴스가 나가고 브라질 대통령까지 브라질 주재 한국 대사였던 K모씨에게 장 목사가 우리 브라질을 위해 수고를 많이 하는데 대통령이 도울 일이 없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K대사는 공보국장을 우리에게 보내어 이 같은 사실을 전하며 대사관저에서 우리를 초대, 만찬을 베풀겠다기에 22명이 가서 성찬(誠餐)을 나누며 세 시간 반 동안 대사님과 환담하기도 했었다.


브라질에서 저녁 7시 30분부터 8시 까지 30분간 채널 8번 TV에서 생중계로 TV 방송을 두 번이나 하기도 했다. TV 방영 이후 아침 식당에 갔더니 식당 직원들이 TV에 나온 사람이라며 호감을 보이고 음식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브라질은 과거 353년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포르투갈에서 천주교회를 많이 세웠으나, 포르투갈 세력이 국제적으로 쇠퇴 되면서 브라질의 천주교회도 토착화 내지 샤머니즘으로 전락하여 변질한 것 같았다.

정통한 진리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 구원의 사역에 대한 사명의욕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 곳에 한국 사람으로 6.25 남침때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서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선언으로 인도로 갔다가 다시 남미 브라질로 가서 깜비나스 장로교 신학(130여년 된 미국 북장로교회서 세운 신학교. 총장은 미국인이었고 내게 매년 2박 3일씩 교수와 학생 전원에게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과 바른 목회에 대해서 특강을 요청 했었다.)을 하고 목사가 된 L모 목사가 장년 700여명의 큰 교회 목회를 하며 노회장 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TV에서 인터뷰 할 때 L 목사님이 통역을 했다. 그 후 그 분을 한국 서울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의 한을 풀게도 했었다.

<계속>

♣최근 굿뉴스미션워싱턴필름(대표 이태봉 목사)이 한국성은교회 장재효 목사의 목회 일대기를 다큐멘터리(http://www.youtube.com/watch?v=ozEoEVL7-qc&feature=player_embedded)로 제작했으며, 기독일보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된 장재효 목사의 목회 에세이 '야향(野香) 장재효(張在孝) 목사의 목회와 선교'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