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 장평면 진산리에서 태어나 친척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한의학 관련 고서적을 통해 한의사의 꿈을 키워 온 김이주 원장. 시골에서 양방 병원 조수로 5년, 서울 동산한의원에서 10여년, 그러다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한의원을 오픈했지만 지하철 공사 사고로 타격을 받아 정리하고 미국행을 결정한다.
미국에서의 삶도 호락호락 하진 않았다. 낮에는 공부, 밤에는 페인트칠 일로 숨가쁘게 살던 중 3층 높이에서 떨어져 발이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한의원에 대한 꿈을 접지 않고 85년 로얄한의대를 2회생으로 졸업, 동산한의원을 개원한다.
또한 한의대 학생시절 한 장로를 통해 나성동산교회에 인도되어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 교회를 지금까지 섬기며 50여년간 ‘한의사’라는 한 우물을 파고, 73세의 늦깎이 나이지만 한국에 있는 고향에 교회를 세울 꿈에 부풀어 있다.
-언제부터 한의와의 인연이 시작되셨고, 어떻게 미국행을 택하게 되셨나요?
20대 때 한의학과 관련된 고서적을 깊이 탐독하며 큰 매력을 느꼈고 그때부터 병원에서 조수 생활을 하며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저는 서울로 올라와 국도한의원이란 곳에서 양방과 한방을 결합해 치료하며 치질전문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이어 영등포에 한의원을 개원했는데 실력은 있었지만 제가 너무 젊은 나이(20대)였기 때문에 환자들이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한의원을 정리하고 보건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전에 같이 일했던 한의사가 동산한의원을 개원해 저를 스카우트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보조같이 일했습니다. 이후 손님이 새떼 몰리듯이 많이 몰려 원장이 병에 걸려제가 원장처럼 10여 년간 진료를 도왔습니다. 그 후 광수당이라는 한의원을 개원했으나 한의원 바로 앞 서울 지하철 공사장에서 붕괴사고가 생겨 한의원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 이후 평소 한의학의 볼모지인 미국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은 생각을 현실로 펼쳐 보기로 했습니다.
-미국에 오신 후 어떻게 자리를 잡으셨나요?
그 당시 미국에 가려면 2명의 보증인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만큼 미국에 가기가 힘들었던 때였지만 다행히 한약협회 회장이었던 김재덕 씨 외 한 명이 보증인이 돼주어 미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나오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는 등의 어려움으로 미국으로 나오려 했던 7명 중 3명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 도착해서 간 곳은 산호세였습니다. 그곳에서 4개월 정도 머물며 페인트칠 하는 일을 했습니다. 후에 집주인에게 쫓겨나다시피 LA행을 택했습니다. LA에서 한의원을 개원하고 싶었지만 한의사 라이센스가 필요했습니다. 라이센스를 위해서 동국로얄한의대의 전신인 로얄한의대에서 85년도에 2회 졸업을 했고, 돈을 모으기 위해 페인트칠 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3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왼쪽발이 부러졌습니다. 그 당시 치료를 제대로 못해 아직도 왼쪽 발에는 심한 흉터가 남아 있고, 아직도 발에 통증을 느낍니다. 학교생활 당시에는 학생이지만 이미 치료경력이나 실력이 있으니 나이든 사람들이 저를 시기질투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학생회장이 된 후 곧 규율이 잡혔고 그들도 저를 인정해 줬습니다.
가주한의사협회에서 총무, 부회장을 거쳐 수석부회장도 3번 했고, 한의사 보수교육이나 세미나 강사로도 많이 다녔습니다. 세미나 때 강의가 좋았는지 유인대학에서 Ph.D.학위도 받게 됐고, 그곳 강단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세계침술학술대회도 열고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신앙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85년 9월에 지금의 자리에 동산한의원을 개업한 후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종교가 불교였습니다. 그러다 83년 10월경에 김윤구 장로란 분이 한인회관 밑에서 인쇄소를 하실 때인데 나성동산교회(한기형 담임목사)에 나오라고 전도하셨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곳이 동산한의원이었고 앞으로 제가 오픈하려고 하는 한의원의 이름도 동산한의원이어서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그때부터 동산교회에 나가게 됐고 지금까지 그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현재는 은퇴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다른 한의원들과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당뇨, 파킨슨병, 불임병, 치질 등 치료가 잘 안되는 불치병을 치료한 경험이 많습니다. 지인이 불임증인 미국 여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녀는 임신 중에 자꾸 하혈해서 유산이 되었는데 제가 치료한 후 아기를 갖게 되니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저의 나이가 73세이지만 아직도 어떤 병이든 암만 빼고 다 고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제 아들은 저에게 자꾸만 쉬라고 합니다. 하지만 늙은 저에게도 소망이 생겼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고향에 다녀온 게 2007년이었는데 아직도 그곳에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꿈이고, 또 하나 더 꿈이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입니다. 땅은 화순군, 보성군, 장흥군 경계선에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됩니다.
문의 213-382-0060
미국에서의 삶도 호락호락 하진 않았다. 낮에는 공부, 밤에는 페인트칠 일로 숨가쁘게 살던 중 3층 높이에서 떨어져 발이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한의원에 대한 꿈을 접지 않고 85년 로얄한의대를 2회생으로 졸업, 동산한의원을 개원한다.
또한 한의대 학생시절 한 장로를 통해 나성동산교회에 인도되어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 교회를 지금까지 섬기며 50여년간 ‘한의사’라는 한 우물을 파고, 73세의 늦깎이 나이지만 한국에 있는 고향에 교회를 세울 꿈에 부풀어 있다.
-언제부터 한의와의 인연이 시작되셨고, 어떻게 미국행을 택하게 되셨나요?
20대 때 한의학과 관련된 고서적을 깊이 탐독하며 큰 매력을 느꼈고 그때부터 병원에서 조수 생활을 하며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저는 서울로 올라와 국도한의원이란 곳에서 양방과 한방을 결합해 치료하며 치질전문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이어 영등포에 한의원을 개원했는데 실력은 있었지만 제가 너무 젊은 나이(20대)였기 때문에 환자들이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한의원을 정리하고 보건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전에 같이 일했던 한의사가 동산한의원을 개원해 저를 스카우트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보조같이 일했습니다. 이후 손님이 새떼 몰리듯이 많이 몰려 원장이 병에 걸려제가 원장처럼 10여 년간 진료를 도왔습니다. 그 후 광수당이라는 한의원을 개원했으나 한의원 바로 앞 서울 지하철 공사장에서 붕괴사고가 생겨 한의원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 이후 평소 한의학의 볼모지인 미국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은 생각을 현실로 펼쳐 보기로 했습니다.
-미국에 오신 후 어떻게 자리를 잡으셨나요?
그 당시 미국에 가려면 2명의 보증인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만큼 미국에 가기가 힘들었던 때였지만 다행히 한약협회 회장이었던 김재덕 씨 외 한 명이 보증인이 돼주어 미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나오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는 등의 어려움으로 미국으로 나오려 했던 7명 중 3명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 도착해서 간 곳은 산호세였습니다. 그곳에서 4개월 정도 머물며 페인트칠 하는 일을 했습니다. 후에 집주인에게 쫓겨나다시피 LA행을 택했습니다. LA에서 한의원을 개원하고 싶었지만 한의사 라이센스가 필요했습니다. 라이센스를 위해서 동국로얄한의대의 전신인 로얄한의대에서 85년도에 2회 졸업을 했고, 돈을 모으기 위해 페인트칠 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3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왼쪽발이 부러졌습니다. 그 당시 치료를 제대로 못해 아직도 왼쪽 발에는 심한 흉터가 남아 있고, 아직도 발에 통증을 느낍니다. 학교생활 당시에는 학생이지만 이미 치료경력이나 실력이 있으니 나이든 사람들이 저를 시기질투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학생회장이 된 후 곧 규율이 잡혔고 그들도 저를 인정해 줬습니다.
가주한의사협회에서 총무, 부회장을 거쳐 수석부회장도 3번 했고, 한의사 보수교육이나 세미나 강사로도 많이 다녔습니다. 세미나 때 강의가 좋았는지 유인대학에서 Ph.D.학위도 받게 됐고, 그곳 강단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세계침술학술대회도 열고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신앙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85년 9월에 지금의 자리에 동산한의원을 개업한 후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종교가 불교였습니다. 그러다 83년 10월경에 김윤구 장로란 분이 한인회관 밑에서 인쇄소를 하실 때인데 나성동산교회(한기형 담임목사)에 나오라고 전도하셨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곳이 동산한의원이었고 앞으로 제가 오픈하려고 하는 한의원의 이름도 동산한의원이어서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그때부터 동산교회에 나가게 됐고 지금까지 그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현재는 은퇴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다른 한의원들과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당뇨, 파킨슨병, 불임병, 치질 등 치료가 잘 안되는 불치병을 치료한 경험이 많습니다. 지인이 불임증인 미국 여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녀는 임신 중에 자꾸 하혈해서 유산이 되었는데 제가 치료한 후 아기를 갖게 되니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저의 나이가 73세이지만 아직도 어떤 병이든 암만 빼고 다 고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제 아들은 저에게 자꾸만 쉬라고 합니다. 하지만 늙은 저에게도 소망이 생겼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고향에 다녀온 게 2007년이었는데 아직도 그곳에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꿈이고, 또 하나 더 꿈이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입니다. 땅은 화순군, 보성군, 장흥군 경계선에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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