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때마다 늘 습관적으로 꺼내 무릎 밑에 까는 방석이 오늘 따라 유난히 달라 보인다. 또 누군가 새로운 방석을 가져다 놓은 듯 싶다. 갑자기 그 방석을 향한 고마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롭게 샘솟아 오른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인데 내가 교회 사역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막중한 책임감과 나의 부족함의 그 깊은 괴리를 메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 뿐이라는 깨달음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대상 뒤 십자가 밑에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힘을 얻었다. 기도는 즐겁고 기뻤지만 기도의 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어쩔 수 없이 무릎이 조금씩 저려와 자세를 바꾸곤 했다.

어떤 분들의 눈에 그 모습이 조금은 애처로워 보였나 보다. 어느 권사님 한 분이 극진한 정성을 들여 고급스럽게 수를 놓은 방석을 들고 오셨다. 푸근한 것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방석을 몇 년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또 몇 년이 지나자 그 방석이 조금은 닳고 퇴색된 느낌이었는지 어느 날 가보니 새로운 방석이 놓여 있다. 또 누군가의 정성이 가득 담긴 방석이었다. 같은 권사님이 만드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분의 솜씨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똑같은 은혜를 느끼면서 나는 그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푸근한 사랑과 격려가 방석으로부터 느껴졌다. 그렇게 몇 년 주기로 방석은 바뀌고 또 바뀌고 있다. 그 정성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목회자들에게는 늘 이런 저런 어려움과 고충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 그것이 좀 심해서 상처가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늘 하는 말이지만 나는 많은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고충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목회의 보람과 사명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면 첫째는 갈수록 깊어가는 주님의 사랑이요. 그 다음은 이렇게 말없는 곳에서 은근한 사랑과 격려를 보내는 무언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대체로 말이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때로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아파오는 무릎을 괴어주는 이 푸근한 방석처럼 그들의 존재는 공기처럼 바람처럼 늘 주위에서 훈훈하게 느껴진다. 그 따뜻함과 사랑이 목회자로서 겪는 여러가지 시련과 어려움으로 좌불안석 몸둘 바를 모르는 순간에도 나를 지켜주고 위로해 준다. 마치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기도하던 모세의 손이 내려갈 때 좌우에서 그 손을 붙들어 주던 아론과 훌처럼 이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목회자에게 그런 격려와 용기를 주는 귀한 동역자들이다.

어느 전도사님의 이야기로는 실제로 한국에서 기도를 열심히 하는 목회자들 중에는 무릎이 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아마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래 앉아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고맙게도 나에게는 아직 그런 문제가 없다. 조용히 기도의 자리에 방석을 가져다 놓는 은밀한 손길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이랴 부족한 내가 지금까지 이만큼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목회자의 부족을 감싸주고 목회자의 연약함을 보완해 주는 온 성도들의 또 다른 방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얼마나 행복한 목회자인지 모르겠다. 그 따뜻한 사랑들을 기억하며 난 또 오늘도 기도의 방석 위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이름 모를 그 방석의 주인공들을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