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량 목사.

한국 교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오늘날처럼 높은 때는 일찍이 없었다. 이런 열망은 때로 지나친 교회비판을 통하여 개혁의 소망과는 정 반대로 교회 파괴 현상으로 나타난다. 비판은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를 점차 허약하게 하고 쇠퇴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는 수가 많다. 왜냐하면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기 쉬운 까닭이다.

그 뿐인가! 비판은 대체로 비난으로 끝맺음이 되는 일이 다반사이다. 비판은 분명한 근거와 자료와 증거에 의해 전개되어야 함에도 주관적이며 감정적이고 무책임한 카터라의 유비통신에 의한 비판 경우도 허다해서 비판인지 비난인지 구별 할 수 없게 되어 결국은 안티세력에 동조하는 꼴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비교종교가 수치와 통계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의 구제헌금과 선교헌금을 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못 흥분되는 일이다. 그럴 때 안티기독교 세력들이 어떻게 나오게 될까?

중미의 아이티가 대 지진이 난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세계인의 관심이 희석되어 가는 이때에 아직도 저들을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돕는 기관이 있다면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들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들이 아닌가!

워싱턴만 하여도 노인문제와 청소년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 종교단체나 사회 유관단체들이 없다. 그러나 워싱턴의 개혁주의 교회들이 결국은 노인문제나 청소년문제에 대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안티가 교회 비판하는 것은 차제로 하고, 교회안의 교회 비판은 먼저 교회관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세우신 두 기관은 가정과 교회이다. 그중에 교회는 자신이 직접 희생하시므로 세우신 기관이므로 그의 사랑의 정도는 가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지상 교회가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반하여 세상에 오염되어 부패하고 타락하므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은 교회사 안에서 되풀이 되었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읽어보라! 21세기의 교회의 부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취가 나는 교회시대를 그리고 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교회를 정결케하는 운동을 부지깽이로 삼아 마치 주님이 성전을 청소하신 것처럼 정결케 하셨다.

그러나 그 부지깽이, 이를테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나 가톨릭의 반 종교개혁운동으로 일어난 수도원운동이나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나 근세에 일어난 부흥운동이나 대각성운동 그리고 20세기의 제자화 운동이나 성령운동 등등은 다 사라져 버렸다.

교회를 비판한 운동들은 교회 정화와 성결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비판과 비난의 대상인 교회는 여전히 생동하는 교회로 남아 있다. 비록 지상교회가 지역을 따라 명멸하는 국지적 현상을 목도하지만 주님의 교회를 온 세상에 세우기 위해 순교도 마다치 않는 일사각오의 선교사들이 지구촌을 누비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개혁은 교회를 사랑하는 데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교회 사랑은 이렇게 웅변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