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절망이나 불행, 아픔과 상실 이런 것들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데 그리 익숙해 있지 않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남의 이목이나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주의 문화와 관습과 전통에 깊이 젖어있는 아시안 이민 1세대 일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남자는 남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거나, 힘들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나약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경우이다.

특히 남을 리드하는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상한 감정이나 힘든 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하는데 매우 서툴거나 주저하게 된다.

몇 해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최진실씨의 자살은 세간에 많은 소문들을 일으켰었다. 목회상담가인 필자에게 그의 죽음이 안타까왔던 것은 그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 많은 인간관계를 맺었음에도 자신의 답답하고 억눌리고 힘든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자신의 가슴에 오랫동안 묻어두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최진실사단” 이라고 하는 아주 절친한 친구들의 그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의 누구도 최진실씨가 그토록 심각한 우울증과 함께 정신적, 심리적 억눌림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탓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상한 심령과 마음을 타인에게 털어놓고 고백하며 도움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데 있다. 혹자는 그냥 술한잔 마시고 툭 털어놓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깊은 고통과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잘 인식하고 그 아픔을 인정하기 까지는 오랜시간과 함께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실, 아픔과 절망 그리고 아픔을 겪고있는 사람이 그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가슴과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실망과 절망을 가져다 준 그 상황과 그에 따른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이다.

필자는 한때 미군과 결혼한 이중문화가정여성들이 교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를 섬긴 적이 있다. 열명 중 일곱명 정도는 이중문화여성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많은 이중문화여성들은 크고 작은 한 (恨)을 가지고 산다. 미군과 결혼한 내력에서부터 시작해서 낯선 미국에서의 삶, 그리고 한인이민자들로부터 받아야만 했던 조롱과 멸시와 차별은 그야말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아픈 상처를 그 들은 가슴속에 담아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떤 분들은 찬양과 성경공부와 하나님안에서의 온전한 친교와 만남을 통해서 서서히 자신들안에 있던 두려움과 수치스러움 등을 극복하고 자신의 참된 가치를 알아가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경험했던 그 아프고 쓰라린 삶의 이야기들을 표현하며 오히려 그 안에 숨어있는 감사의 조건들을 재발견하며 다시 써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큰 은혜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들이 경험했던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고 바꿀 수도 없었지만, 그 “상황”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표현하는 가운데 그들 “자신”이 바뀐 것이다.

요한일서 4장 18절은,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우리의 표현 여부에 관계없이 존재하지만, 우리 안에 우리들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픔과 위기속에서 인정하며 표현할 때 우리는 자신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발견하게 된다.

즉, 과거와 현재 경험하는 절망과 한숨과 고통은 뭔가 잘못되고 숨겨야만되는 부끄러운 것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정상적인 일부분 이며,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될 수 있다 는 믿음과 담대함을 갖는 것이 치유의 첫 걸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