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음유시인이며 작곡가였던 파꾼도 까브랄이 객지에서 비명횡사했다. 아르헨티나는 국가적 슬픔에 젖었고, 그의 노래와 연주를 사랑했던 중남미 라티노들은 한동안 가슴을 치며 고통스런 추모의 시간을 갖고 있다.

‘No soy de aqui, ni soy de alla (노 쏘이 데 아끼, 니 쏘이 데 아야, I'm not from here nor there, 나는 여기에 속하지도, 또 저기에 속하지도 않았습니다)’를 부른 아르헨티나 출신 음유시인 파꾼도 까브랄은 '빰빠스'(아르헨티나 대초원)의 작곡가 겸 음유시인으로 가왕 조용필처럼 중남미 라티노들에게 사랑받는 국민 가수다.

그가 지난 7월 생전의 마지막 공연을 과테말라에서 가졌다. 이어서 께짤떼낭고, 니카라과 연주 여행을 진행하던 중, 공항으로 향하던 길에 매복되어 있던 괴한들의 무차별 사격에 현장에서 불귀의 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193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50km 떨어진 라 쁠라따 강 유역의 딴딜(tandil)에서 출생했다. 그가 9살되던 해 그의 부친은 집을 떠났다. 어린 파꾼도는 그의 모친과 여섯 형제들의 호구지책을 해결하기 위해 3000km 걸어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다.

1978년에는 그의 아내와 한살배기 어린 딸이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사고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었고, 시력도 거의 잃어 맹인처럼 평생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몸에 퍼진 암은 죽음의 그림자를 그의 삶에 그림자처럼 얹었다. 아르헨티나에 서슬 퍼런 군부독재가 횡행할 때인 1976부터 1983년 시기엔, 멕시코로 망명해야 했다.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그의 생애, 질곡같은 인생의 고통스런 터널에서, 그는 수없이 전능자를 향하여 절규하며 부르짖었다. “하나님 ! 왜 나에게 고통, 굶주림, 짧은 행복, 갈등, 빛, 암과 매독, 봄과 사과튀김을 주셨나이까?”

그럴 때마다, 그는 조금씩 깨달았다. 어릴적 고통스런 경험들, 가족을 잃은 슬픔들, 삶속의 문제점과 참담한 암과 건강의 문제점들은 그를 겸손케 하셔서 상처받은 많은 영혼을 위로하기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심을.

실제로 그가 경험했던 고난은, 잠재되어 있었던 그의 영감을 자극했고, 수많은 노래와 시들을 짓는 원천이 되었다. 1996년 UN의 세계 평화대사로 임명받아 8개의 언어권, 165개 나라를 순회하며 평화의 전령으로 꿈과 소망을 선물하는 귀한 사역에 헌신했다.
 
그의 주옥같은 노래들 속엔 겸손함과 따뜻함과 인간미 넘치는 서정이 흐른다. “Me gusta el mar y la mujer llora, las golondrinas y las malas senoras, saltar balcones y abrir las ventanas y las muchachas en abril…no soy de aqui, no soy de alla(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다와, 울고있는 여인과, 제비들입니다,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발코니에서 뛰는 것과, 창문을 여는것, 그리고 4월의 아가씨들입니다, 나는 여기에 속하지도, 저기에 속하지도 않았답니다).”

지난 7월 9일, 새벽 5시 30분경, 과테말라 시티 호텔에서 나와 공항으로 향하던 중, 그가 탄 백색 SUV 차 곁으로, 어둠을 가르고 밀착하는 세대의 암살자들의 차량이 근접했다. 순간적으로 인근 소방서로 피하려 했지만 좌우 양옆과 앞을 가로 막은채 AK-47 소총을 난사했다. 20여발 중 8발을 맞고 차 내부에서 즉사했다.

평소 치안이 불안한 것에 대비해 경호 차량이 따랐지만 무섭게 계획된 조직 범죄를 피할 순 없었다. 알바로 꼴론 과테말라 대통령은 3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갖게했고, 아르헨티나와 세계 모든 이에게 사죄의 성명을 발표했다. 과테말라의 1992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리고베르따 멘추(Rigoberta Menchu)도 “파꾼도는 스승이었습니다”며 추모했다. 멕시코를 비롯한 중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인한 살인 광풍이 소름끼치도록 두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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