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매님은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서 늘 힘들어 하십니다. 소위 말하는 코드가 안맞아서 잘 부딪힙니다. 자신도 힘든데, 심지어 자녀들끼리도 사이가 좋지 않아 더 힘들어 합니다. 겉으로 내색은 안해도 만날 때마다 속이 상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래도 모임에 나가야 하나? 모일 때 마나 회의가 일었지만, 마음을 잘 추스렸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 “그 사람은 나의 영적 뻬빠야!”

릭 워렌 목사님의 저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으면서 참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가족이나, 직장이나, 교회의 모임에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꼭 하나씩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그 사람을 붙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을 통하여 우리의 모난 인격을 다듬게 하시고,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자기의 원수가 아니고 자기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주어 성숙케 해주는 영적 “뻬빠”(Sand Paper)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꼭 한사람씩은 있습니다. 그 사람만 없으면 가족이 행복할 것 같고, 그 사람 만 없으면 교회 목장(구역)이 잘 될 것 같고, 그 사람만 없으면 직장생활이 풀릴 것 같고, 그 사람만 없으면 교회 생활도 할만 할 것 같은데,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힘든 이유가 바로 “너 때문이야!” 라고 하면서 “네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내 옆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오히려 나를 다듬어 주고 모나지 않게 해 주는 영적 도우미로 생각한다면, 힘든 상황에서도 참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오스카 톰슨이라는 분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무슨 단어를 택하겠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자신은 주저하지 않고 “관계”라는 단어를 택하겠다고 말입니다. 사랑, 혹은 행복 등의 단어들을 좋아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바로 관계라는 것임을 알고있는 분입니다. 최근에 제가 설교한 내용들을 훑어보니, 저 역시 “관계”라는 말을 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관계처럼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고 관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질문한 바리새인에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 속에”(within you) 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너희 사이에”(among you)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교회에서 누가 성숙한 사람인가를 생각할 때,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하고, 십일조를 잘 하고,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서 정말 성숙한 신앙인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왜 싫은 사람이 없겠습니까? 미운 사람을 보면 왜 상대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자기 스타일이 아닌 사람을 보면 왜 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나의 영적 성숙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붙여주신 영적 뻬빠임을 안다면 오히려 그 사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영적 뻬빠인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