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왜 믿음 좋은 성도가 고통 받아야 되는 가 일 것이다. 즉, 왜 김집사는 신앙이 그렇게도 좋은 것 같은데 저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것일까? 나보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하지도 않는 저 박집사는 얄미울 정도로 돈을 긁어 모을까?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거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한 두 번쯤은,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이 하면서 괴로워한 기억이 있으리라 짐작된다.
사실, 위의 질문들은 상담하러 오는 내담자들이 나에게 종종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과연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아마도 거의 한 명도 없지 않나 싶다. 그런데,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의도를 먼저 다룰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이 없이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너무 성급한 나머지는 건강하지 못한 신앙관과 인생관을 갖게 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먼저,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진 기준으로 믿음이 좋다, 나쁘다라는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식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가진 기준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정해지기 쉽다. 예를 들면, 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나온다거나 헌금을 많이 낸다거나 하는 것이다. 물론, 신앙이 없이는 이런 일들을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합당한 사람인 지는 우리가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믿음이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거나 하는 말들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본인과 하나님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는 믿음이 좋으면 고통 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자신이나, 가정, 그리고 교회 등이 형통하게 잘 되리라는 믿음이 우리의 내면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믿으면 분명 복 받을 수 있다. 만사가 형통할 수 있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반면에, 어려움과 환란이 닥쳐 올 수도 있다. 사업이 잘 안 될 수도 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일찍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아이가 병 들 수도 있다. 반드시 좋은 대학 못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후자를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요즈음 ‘십자가 신학’ 대신에 ‘번영신학’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일이 잘 안 풀리고, 문제가 생기면 마치 자신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찝찝함을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신앙과 고통 혹은 성공을 자꾸 연결시키려고 하는 종교적인 습관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머리와 마음에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며, 우리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한다면, 굳이 우리의 삶의 성공 혹은 고통에다 신앙을 크게 대입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맛보는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존재하며 우리들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과 고통이 반비례 하는 가 혹은 정비례하는 가의 질문은 거의 우문(愚問)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다만, 필자가 오랜 기간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며 연구하고 임상 실습을 경험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고통은 우리의 삶 속에서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아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가정이나 가계살림도 그렇고, 직장에서의 생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다지 나아지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맥 빠지기 쉬운 현실 가운데서 하루하루 지나가기 쉬운 요즘이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오늘을 건강하게 살아가자. 오늘 비록 지치고 힘겹다 하더라도 여전히 내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늘 “가능성”을 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며 우리의 삶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위의 질문들은 상담하러 오는 내담자들이 나에게 종종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과연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아마도 거의 한 명도 없지 않나 싶다. 그런데,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의도를 먼저 다룰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이 없이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너무 성급한 나머지는 건강하지 못한 신앙관과 인생관을 갖게 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먼저,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진 기준으로 믿음이 좋다, 나쁘다라는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식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가진 기준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정해지기 쉽다. 예를 들면, 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나온다거나 헌금을 많이 낸다거나 하는 것이다. 물론, 신앙이 없이는 이런 일들을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합당한 사람인 지는 우리가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믿음이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거나 하는 말들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본인과 하나님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는 믿음이 좋으면 고통 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자신이나, 가정, 그리고 교회 등이 형통하게 잘 되리라는 믿음이 우리의 내면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믿으면 분명 복 받을 수 있다. 만사가 형통할 수 있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반면에, 어려움과 환란이 닥쳐 올 수도 있다. 사업이 잘 안 될 수도 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일찍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아이가 병 들 수도 있다. 반드시 좋은 대학 못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후자를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요즈음 ‘십자가 신학’ 대신에 ‘번영신학’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일이 잘 안 풀리고, 문제가 생기면 마치 자신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찝찝함을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신앙과 고통 혹은 성공을 자꾸 연결시키려고 하는 종교적인 습관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머리와 마음에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며, 우리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한다면, 굳이 우리의 삶의 성공 혹은 고통에다 신앙을 크게 대입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맛보는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존재하며 우리들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과 고통이 반비례 하는 가 혹은 정비례하는 가의 질문은 거의 우문(愚問)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다만, 필자가 오랜 기간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며 연구하고 임상 실습을 경험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고통은 우리의 삶 속에서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아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가정이나 가계살림도 그렇고, 직장에서의 생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다지 나아지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맥 빠지기 쉬운 현실 가운데서 하루하루 지나가기 쉬운 요즘이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오늘을 건강하게 살아가자. 오늘 비록 지치고 힘겹다 하더라도 여전히 내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늘 “가능성”을 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며 우리의 삶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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