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의 ‘위령공편’에 이런 글귀가 있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목숨을 구하려고 仁을 해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여 仁을 성취한다” 공자는 사람이 성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仁을 꼽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목숨 때문에 인을 버릴 수가 없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인을 이루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승에게까지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니, 공자의 제자뿐 아니라 경건되이 뜻을 이루려는 모든 진실된 사람들에게 살신성인은 삶의 좌표가 되어 내려온다.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며 자신의 심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주변을 위해 봉사하며 헌신하는 경우에 표현될 수 있는 사자성어이다.
아름답고 우아한 희귀한 새 한마리가 먹이를 구하려 돌아다니다 사람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잡혔다. 희귀한 새이기에 새를 좋아하는 그 나라 왕자에게 바쳐진다. 왕자는 이 새가 너무 아름답고 귀하기에 특별히 황금으로 만들어진 새장에 넣어두고는 애지중지 기르고 있다. 그러나 잡힌 새에게 필요한 것 행복한 것은 황금새장이 아니다. 그래서 새는 왕자를 대할 때마다 자기를 놓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나 왕자는 다른 것은 다 들어주어도 그 소원만은 절대 들어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자신이 새장에서 빠져나올수 없다 생각한 새는 왕자에게 마지막이라며 자신의 소원을 말해주었다. “왕자님 저를 풀어주실 수 없다면 어느산 아무 골짜기에 있는 저희 가족들에게, 제가 왕자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주십시요” 라고 청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의 부탁은 누구나 거절하기가 힘든 법. 왕자는 기꺼이 새의 요청을 들어준다. 애완조의 안부를 전하러 갔던 신하가 돌아와 보고를 한다. “새의 가족을 만나 애완조의 행복한 삶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새의 누이가 그만 쇼크를 받고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말았습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들은 애완조는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그만 새장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몸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왕자는 이미 죽어버린 새를 더 기를 수는 없어 새장에서 꺼내 애석한 마음을 갖고 담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런데 땅에 떨어질 줄 알았던 새는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 버리는게 아닌가?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이라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우화이지만 교훈됨이 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답답해 하는 바가 있다. 진리를 위해, 선을 위해, 공의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모든이들의 믿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고통을 자처하는 자가 왜 이다지 찾기가 힘든 세상이냐는 것이다. 소위 똑똑한 자는 넘쳐나는데 존경받는 자는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어져가니, 참으로 세상살이가 점점 피곤해져만 간다는 느낌이 들만도 하다.
링컨 대통령은 자신을 원숭이라 비하하고 조롱하는 ‘에드윈 스탠톤’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가 저격 당했을 때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지 않고 쓰러진 링컨의 몸을 덮으며 ‘여기 위대한 정치가가 누워있다’라며 흐느낀 스탠톤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링컨이 정적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살신성인의 성품과 그를 뒷받침 할만한 능력이 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감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것이 있다면 나팔불기 바쁘고, 그것을 이용하여 힘없는 자에게 군림하기를 즐거워하며, 공공의 이익보다는 사욕 채우기에 급급한 범인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듯하니, 어찌 우리 사회에서는 링컨과 같은 ‘신앙의 큰그릇’을 만나볼 수 없는가? 하는 아쉬움이 많다.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교계의 부끄러운 자리다툼의 소식을 접할 때 마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생각하고, 승자도 패자도 미덥지 못하다고 인식하는 사회의 정서도 모른체, 내가 승자인양 내가 큰 그릇인양 착각하는 그 오만이 -나는 비록 작은 그릇이기는 하나 - 나에게는 없을까 하며 내 자신을 돌이켜 본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길 꿈꾸는 인물이 자라나고 있다는 큰 기대가 다소의 위안이 될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살신성인의 삶을 살다 간 분을 예수님 외에는 달리 찾기가 지금으로서 힘들다면 우리 사회의 불행이 아닐수 없다. 어려운 시기마다 인물을 세우신 사사시대의 하나님께서 혼탁한 이 시대에 ‘살신성인’의 큰 인물을 우리 정계와 교계에 내려주시기를 기도한다. Dahn1957@gmail.com
아름답고 우아한 희귀한 새 한마리가 먹이를 구하려 돌아다니다 사람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잡혔다. 희귀한 새이기에 새를 좋아하는 그 나라 왕자에게 바쳐진다. 왕자는 이 새가 너무 아름답고 귀하기에 특별히 황금으로 만들어진 새장에 넣어두고는 애지중지 기르고 있다. 그러나 잡힌 새에게 필요한 것 행복한 것은 황금새장이 아니다. 그래서 새는 왕자를 대할 때마다 자기를 놓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나 왕자는 다른 것은 다 들어주어도 그 소원만은 절대 들어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자신이 새장에서 빠져나올수 없다 생각한 새는 왕자에게 마지막이라며 자신의 소원을 말해주었다. “왕자님 저를 풀어주실 수 없다면 어느산 아무 골짜기에 있는 저희 가족들에게, 제가 왕자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주십시요” 라고 청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의 부탁은 누구나 거절하기가 힘든 법. 왕자는 기꺼이 새의 요청을 들어준다. 애완조의 안부를 전하러 갔던 신하가 돌아와 보고를 한다. “새의 가족을 만나 애완조의 행복한 삶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새의 누이가 그만 쇼크를 받고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말았습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들은 애완조는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그만 새장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몸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왕자는 이미 죽어버린 새를 더 기를 수는 없어 새장에서 꺼내 애석한 마음을 갖고 담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런데 땅에 떨어질 줄 알았던 새는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 버리는게 아닌가?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이라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우화이지만 교훈됨이 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답답해 하는 바가 있다. 진리를 위해, 선을 위해, 공의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모든이들의 믿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고통을 자처하는 자가 왜 이다지 찾기가 힘든 세상이냐는 것이다. 소위 똑똑한 자는 넘쳐나는데 존경받는 자는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어져가니, 참으로 세상살이가 점점 피곤해져만 간다는 느낌이 들만도 하다.
링컨 대통령은 자신을 원숭이라 비하하고 조롱하는 ‘에드윈 스탠톤’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가 저격 당했을 때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지 않고 쓰러진 링컨의 몸을 덮으며 ‘여기 위대한 정치가가 누워있다’라며 흐느낀 스탠톤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링컨이 정적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살신성인의 성품과 그를 뒷받침 할만한 능력이 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감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것이 있다면 나팔불기 바쁘고, 그것을 이용하여 힘없는 자에게 군림하기를 즐거워하며, 공공의 이익보다는 사욕 채우기에 급급한 범인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듯하니, 어찌 우리 사회에서는 링컨과 같은 ‘신앙의 큰그릇’을 만나볼 수 없는가? 하는 아쉬움이 많다.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교계의 부끄러운 자리다툼의 소식을 접할 때 마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생각하고, 승자도 패자도 미덥지 못하다고 인식하는 사회의 정서도 모른체, 내가 승자인양 내가 큰 그릇인양 착각하는 그 오만이 -나는 비록 작은 그릇이기는 하나 - 나에게는 없을까 하며 내 자신을 돌이켜 본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길 꿈꾸는 인물이 자라나고 있다는 큰 기대가 다소의 위안이 될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살신성인의 삶을 살다 간 분을 예수님 외에는 달리 찾기가 지금으로서 힘들다면 우리 사회의 불행이 아닐수 없다. 어려운 시기마다 인물을 세우신 사사시대의 하나님께서 혼탁한 이 시대에 ‘살신성인’의 큰 인물을 우리 정계와 교계에 내려주시기를 기도한다. Dahn195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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