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개혁주의 교회들이 스스로 개신교라고 호칭하고 또 칭함을 받는 것에 익숙하게 되었다.

개신교라는 말은 캐톨릭이 개혁주의 교회를 비하해서 부르는 말이다. 중세말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일구어 낸 개혁주의 교회는 결코 改新의 의미를 담은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초대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이다, 다만 하나님 면전에서 잘못된 것을 계속적으로 개혁하여 새롭게 됨을 표방하는 교회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개혁교회는 개신교쯤으로 전락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내부적 혼돈에 휩싸여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세속화를 가속화 시킨 일부 복음주의자들에게 있다. 심지어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도 점차 개혁주의 신앙을 내팽개치고 복음의 상업화에 매진하여 소위 성공목회나 매머드 선교에 기치를 내걸고 거침없이 내달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복음주의 위세가 기세등등 한 이때에 개혁주의로 회귀는 오직 개혁주의자들의 대 경성만이 가능하다. 우선 한국 교회안에 편만한 복음주의 위험성을 알고 경계하여야 한다. 복음주의의 신학적 오류로 인간 중심의 알미니안적 요소나 근본주의에 기초를 둔 복음주의의 문제는 차제로 하고 복음주의가 쏟아낸 병폐만 가지고 논한다 하여도 능히 경성할 만한 자료는 충분하다.

신학 문제를 잠재하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는 명목하에 세상의 인문 과학, 문화, 정치, 마케팅원리와 같은 경제 심지어는 타 종교에 이르기까지 물먹는 하마와 같이 빨아들여 교회 성장을 일구었다.

그 결과 복음주의는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복음주의자들의 성지인 강남신앙은 망해야 한다는 극언의 비판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게도 고민은 있다. 이성과 신앙의 문제, 청부와 청빈의 문제, 교회와 사회의 문제, 제자화운동과 성령운동의 조화, 그래서 진자운동처럼 왔다 갔다 좌충우돌하여 세간에 화제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복음주의가 센세이션널리즘과 결별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복음의 편만화를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은 오히려 복음이 기득권층에 면죄부를 주어 청부론과 같은 별로 달갑지 않는 이슈를 파생케하고 노동자나 경제 하층민으로부터는 외면받는 귀족화를 이루게 된 것이 사실이다. 염치도 없이 기독교의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고, 마치 복음이 자신들의 전유물인양 섹트화로 물색없이 자랑하니 참 딱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 복음주의 1세대들은 서서히 퇴진하고 있다. 한국의 개혁주의는 복음주의 실패를 뒷처리하는 일에 먼저 인내를 가지고 감당해야 한다. 이는 중세 종교개혁자들의 헌신 이상의 수고를 요구하는 일이다. 개혁주의는 먼저 교회성장론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아니 제동을 걸필요도 없이 세상이 먼저 제동을 걸어 놓았다. 이제는 개혁주의자들이 나서서 교회가 참교회다운 면모를 보여줄 때이다. 이제부터 개혁주의는 경성하고 제자리로 회복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