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황제가 밀비안전투에 앞서 보았던 환상은 결국 밀란칙령이라는 교회사의 거대한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3백년에 걸친 대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순수함과 복음전파의 열정을 잃지 않았지만 박해의 종식과 아울러 선물된 신앙의 자유는 교회를 급속도로 타락케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극렬히 비판하고 사막으로 간 사람들이 초대 교회의 수도원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최초로 사막으로 간 것은 아니다. 바울사도는 다메섹도상에서 회심한후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가 바나바에 이끌려 안디옥에 성경교사로 오기까지의 삼년은 베일에 쌓인 기간인데 그가 사막에서 경건훈련을 하였다는 것이 일반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는 모래폭풍사이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였을 것이며 영하의 사막의 밤을 보내며 초롱 초롱 빛나는 별의 군무속에 하나님의 뜻을 갈급하게 구하였을 것이다. 그가 이후에 말하는 영성이란 이런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과 도제훈련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오늘 영성을 말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광대무변한 우주속에 홀로 버려진 고아의 심정으로 사막으로 광야로 나가 보라는 것이다. 온갖 사치와 영화를 다 누리면서 무슨 영성을 논하겠는가! 기껏 한달동안 이상한 수도원에서 관상 기도를 배워 득도한 것처럼 교계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려니까 거품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영성주의자들이 뼈아프게 자숙해야 할 것은 책 몇 권 읽거나, 서재안에서 묵상해서 얻어지는 것이 영성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영성을 말하지 않지만 사람의 시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면 이니스프리의 湖島에 스스로 감금되기를 원했던 예이츠가 조롱하지 않겠는가?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들이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색 날개 소리 가득한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나는 오히려 예이츠에게서 영성을 읽는다. 오늘의 영성주의자들이 예이츠나 사무엘 베개트의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광야로 나가라! 사막으로 가라! 그리고 홀로가 되라 자아를 침전시켜 위로부터 임하는 맑은 영성을 받기 까지 그것이 삼년이 되든 5년이 되든 기다리라! 하기는 예이츠도 읊기를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하였으니 무한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이니스프리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 가서 영성을 말하기 전에 진정한 영성을 체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