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루살렘 서쪽 쉐펠라 (수 15:33절에는 평지로 기록)의 엘라 골짜기에 위치한 히르벳 케야파(Khirbet Qeiyafa)를 탐방하기로 했다. Khirbet Qeiyafa는 이번 개인적인 성경 현장 연구에서 가장 기대해 온 곳이다. Khirbet Qeiyafa 를 찾아갈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의 성경 학자들 간에 오랫동안 논쟁되어 온 고대 이스라엘 국가 출범 시기에 대한 논란이 히르벳 케야파의 발굴을 통하여 마무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적인 배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는,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출범과 정치적 상황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고대 이스라엘 국가 출범 시기에 대해 큰 이견을 갖는 학자들을 Maximalist, Minimalist, Ultra Minimalist로 구분한다.
①Maximalist에 속한 학자들은 Benjamin Mazar, Y. Aharoni, Stager를 포함한 다수의 학자들로, 이들은 성경에 기록된 출애굽 사건은 사실이며, 다윗과 솔로몬은 실존 인물일 뿐만 아니라 이미 주전 1000년에 이스라엘은 통일 왕국을 이루었으며 예루살렘을 수도로 중앙 통치가 이루어졌던 시대라고 주장한다.
②이에 반하여 Minimalist에 속한 학자들은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 사건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 역시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을 다스렸던 왕이 아니라 작은 마을의 통치자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속한 고고학자들은 Israel Finkelstein이 가장 대표적이며 그 외에 Herzog, Singer-Avitz이 있다.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출범 시기를 주전 1000년이 아니라 주전 920년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③더 나아가 Sharon 같은 학자는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출범 시기를 더욱 축소하여 주전 900년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서쪽 성문.
그런데 Khirbet Qeiyafa의 발굴로 말미암아 고대 이스라엘 국가 출범 논란이 마무리되거나 축소주의자들의 주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번 성경 현장 연구에서 Khirbet Qeiyafa를 반드시 찾아가는 이유이다.

엘라 골짜기에 위치한 Khirbet Qeiyafa는 역사 지리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처음 이곳을 찾은 학자들은 19세기 탐험가인 V. Guerin, C.R. Conder, H.H. Kitchener이 있었지만, 20세기 들어 W.F. Albright, B. Mazar, Y. Aharoni, Z. Kallai을 포함하여 아무도 이곳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쉐펠라 지역을 연구해 온 Y. Dagan과 Z. Greenhut이 Khirbet Qeiyafa를 탐사하였고, 이들의 도움을 얻어 2007년과 2008년 Yosef Garfinkel과 Saar Ganor는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의 도움으로 6주간 히르벳 케야파를 발굴하였다. 이 두 번의 발굴로 Khirbet Qeiyafa의 서쪽 약 600m2이 발굴되었다. 이때에 네 개의 방이 있는 성문 (four chambered gate), 성문에 집이 있는 성벽 구조 (casemate wall), 그리고 성문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오스트라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2008년 11월 Khirbet Qeiyafa의 동쪽을 발굴하여 이곳에서 거대한 바위를 사용하여 건축된 두 번째 성문을 발견하였다. 각각의 문에 사용된 바위의 무게는 약 10톤에 이른다. 유다와 이스라엘 시대를 통틀어 두 개의 성문을 갖고 있는 도시로는 Khirbet Qeiyafa가 유일하다. 참고로, 여호수아 15:36절과 사무엘상 17:52절에 보면, 샤아라임(Shaaraim) 지명을 찾을 수 있다. 히브리어로 샤아라임이란 두 개의 성문 (two gates)를 가리킨다. 그동안 여호수아 15장과 사무엘상 17장에 기록된 샤아라임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은 채 학자들간의 근거 없는 주장만 있었다. 그러나 이번 Khirbet Qeiyafa의 발굴로 더 이상 샤아라임의 위치에 대한 이견도 없게 되었다.

▲서쪽 성문을 통해서 뒤에 보이는 산은 아세가이며 그 뒤에 가드가 있다.
Khirbet Qeiyafa에서 발견된 두 개의 성문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히르벳 케야파 보다 3배 또는 4배 더 큰 도시인 라기스, 므깃도 역시 한 개의 성문만 있을 뿐이다. Khirbet Qeiyafa에서 발견된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700미터에 이르며, 성벽의 폭은 4미터에 이르며, 성벽은 방이 있는 성벽 구조 (casemate wall)로 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규모의 요새화된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약 20만톤의 바위가 필요했을 것으로 계산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규모의 요새는 지방의 작은 통치자가 소수의 주민을 이끌고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Khirbet Qeiyafa의 견고한 요새는 절대적 권력과 중앙 집권이 이루어진 국가에 의해 건설된 요새란 것이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어떤 왕이 강력한 정치적 힘을 동원하여 Khirbet Qeiyafa를 건설하였는가? 엘라 골짜기에 위치한 이곳의 지정학적인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Khirbet Qeiyafa의 발굴 유적지 연대는 주전 10세기 초에 속한다. 이런 연대 해석은 지층 분석, 토기 분석, 그리고 이곳의 네 개 구덩이에서 발견된 올리브 나무의 흔적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른 결론이다. 그 시기는 주전 1000-975년 또는 1000-969년에 이른다. 이때는 성경에서 다윗 왕이 통치하던 시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윗 왕은 주전 1000-965년에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으며, 솔로몬은 주전 965-930년 통일 이스라엘 국가를 다스렸다. 그리고 Khirbet Qeiyafa는 약 20년간 존재했을 뿐이다.

▲멀리 베들레헴 산지가 보이며, 사진의 오른쪽 산은 여호수아 17장의 소고와 그 아래로 엘라 골짜기가 있다.
Khirbet Qeiyafa의 연대 결정에 대해서 Maximalist와 Minimalist 간에는 별 이견이 없다. 특히 Minimalist는 이곳에서 발견된 발굴 결과를 매우 곤혹스러워 한다. 그 이유는, 축소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 출범 시기를 주전 10세기 초가 아니라 10세기 말인 920년으로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곳의 발굴로 말미암아 다윗과 솔로몬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의 주장을 철회해야 할 분명한 증거를 만난 것이다.

주전 11세기 말과 10세기 초, 엘라 골짜기의 정치적인 상황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갈등이 심하던 때였다. 블레셋의 큰 도성인 가드는 Khirbet Qeiyafa로부터 서쪽 약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성의 규모 또한 약 30헥타아르에 이르렀다. 가드는 골리앗의 고향으로, 이스라엘에 지속적으로 위협이 되었던 도성으로 다윗은 가드에 필적할 만한 방어 요새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에 엘라 골짜기에 Khirbet Qeiyafa를 건설했을 것이다. 성경에서 엘라 골짜기에 요새를 건설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왕은 주전 10세기 초, 다윗 왕이 유일하다. 또한 Khirbet Qeiyafa의 서쪽 성문에서 발견된 히브리어로 기록된 토기 파편은 이미 이곳에 글이 통용되었고, 십계명의 유사한 교육이 이루어졌음도 알 수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반박하는 학자들도 있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성도들도 간혹 있다. 그들이 성경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으로 믿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므로 성경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일들도 많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본인은 Khirbet Qeiyafa를 현장에서 연구한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기대가 가득했다. Khirbet Qeiyafa의 대략 위치는 이스라엘 지도 좌표(14603-12267)를 지도에 표시해 두었고, Google Earth를 통해서도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 일반 도로에서 약간 벗어나 포장되지 않은 곳을 얼마간 운전해야 할 것도 미리 파악하였다.

오늘은 무슬림의 라마단 기간에 있는 금요일 기도의 날이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도로를 차단하여 호텔을 빠져 나가는 길은 매우 혼잡하였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해발 약 800미터의 유다 산지를 벗어나 벧세메스, 소렉 골짜기, 여호수아 10장의 야르뭍을 지나 엘라 골짜기 근처에 이르렀다. 대략 위치를 알고 있는데다 이곳 주변의 지리를 잘 알고 있기에 차를 세우는 일 없이 곧 바로 엘라 골짜기 근처 비포장 길로 들어섰다. 아무런 이정표가 없는 이런 곳은 감각으로 찾아가야 할 때가 많다. 이런 유적지를 찾아갈 때마다 묘한 감동이 있다. 전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방문하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어느 정도 비포장 길을 지나니 고맙게도 히브리어로 유적지로 향하는 표시를 해 두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현장인 엘라 골짜기를 Khirbet Qeiyafa에서 배경으로 찍은 사진.
그리고 얼마 후에 눈에 띄는 유적지가 나타났다. Khirbet Qeiyafa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미국에서 논문을 읽고 마음에 두었으며, 기대했던 바로 그 현장을 찾아온 것이다. 발굴의 서쪽 성문, 오스트라카가 발굴된 지역, 집이 있는 성벽 구조, 동쪽 성문, 거대한 바위로 건축된 성문 기초석, 집터, 물 저수조, 멀리 소고와 아세가, 엘라 골짜기,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사진에 담았다. 한 낮의 열기는 35도를 넘어서고 있지만 유적지를 탐사하면서 더위를 힘들어 한 적은 없다. 오히려 한 낮의 열기도 즐기게 되었다. 호텔에서 간단하게 빵과 음료수로 아침 식사를 했을 뿐,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은 이 기쁨만으로도 음식을 거를 수 있고, 모든 피로를 다 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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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