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목회자로서의 은퇴는 있지만 전도자로서의 은퇴는 있을 수 없다. 목사로서는 숨이 넘어 갈 때 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여야 한다.

목사뿐이랴! 우리 주 예수 귀하신 주님을 모신 자는 이 주님을 죽으심을 죽을 때 까지 전하여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좋은 것들을 감추고 혼자만 좋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도 자랑하고 싶어 하지 않는가?

나는 다양한 수집벽이 있어 아내와 갈등이 많다. 요즘은 마시는 茶에 취미가 있어 좋은 茶나 좋은 茶器만 보면 형편도 돌아보지 않고 사서 자주 불화한다. 그리고 찻장에 진열된 다기들을 보고 알아주기를 바란다.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랑들은 사실 물색없는 일들이다. 그리고 눈치없이 자주 자랑해보라!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 자랑은 정말 하면 할수록 신이 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자랑하고 전하면 사람들이 듣고 새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한 사람의 생명이 흑암에서 광명으로 돌아온 것을 경험하지 않는가?

생의 무목적가운데 방황하던 자가 다시 생의 의미를 알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힘차고도 능력있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 기쁨이 말로다 할 수 없음을 체험하지 않는가? 날마다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면서 13579로 술에 쩔은 사람이 댓바람에 주초를 끊고 환경을 불사하고 콧노래 부르면서 행복을 구가하게 하는 이 십자가 복음을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전하여야 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이 영광의 십자가를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정죄하고 핍박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자신의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그 누구든지 상대하여 자신의 지식으로 거꾸러 뜨리는 논쟁이 아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그냥 전하여야 만 한다. 그러면 누가 이 놀라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할 수 있을까? 이 십자가의 복음을 발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알키메데스가 목욕중에 욕탕에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비중의 법칙을 발견하고는 유레카 유레카 하면서 벌거벗은체 뛰어 나오면서 외쳤다고 한다. 유레카란 헬라어로 발견했다는 말이다. 얼마나 기뻤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 전파를 위해 24시간을 25시간처럼 살야야 한다, 은퇴하신 분은 목회때 보다 더 바쁘게 전도자의 삶을 신나게 사셔야 한다. 쓸 데 없는 명예심에 불타 남은 생애를 허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복음 전파외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정치에 목을 매고 비정상적 성장에 목을 매니 목회윤리는 사라지고 부폐하고 오염되고 급기야는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번연, 부스, 낙스, 화이트필드, 무디는 보았다. 지옥행 열차를 타려고 끝없이 행렬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지옥의 낭떨어지를 향해 소리없이 진군하는 저 영적소경군단을, 삼만삼천 볼트의 고압선 보다 더 강력한 파워로 끌어드리는 저 무저갱앞에서 얼쩡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보았다. 그래서 맨발의 성자 박춘선옹은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말씀에 미친사람이 되어 일생을 살다가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란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어느 추운 겨울날 지하철 의자에 앉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예수 믿는 이의 동질성의 제 일조는 십자가 복음 전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