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시무장로직을 은퇴한지 7년이 되었습니다. 장로직은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사역을 충실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교회지체직분입니다. 그래서 장로직의 은퇴라고 하는 제도는 어찌보면 교회의 본질에 맞지않는, 아니 있어서는 아닌 될 제도라고 여겨집니다. 어떻게 교회의 직분에 은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장로직책에 대히여 분명한 이해가 요청됩니다. 교회의 일에는 교회라는 단체의 관리 및 운영을 담당해야 하는 분야가 있고, 예수님이 교회에 부탁/명령하신 분야가 있습니다. 전자는 교회정치이고 후자는 교회사역입니다. 교회사역은 예수님이 교회에 명령하신 사명으로서 교회의 지체인 모든 성도는 장로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부름으로 소천할 때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교회정치는 그렇지만 교회의 살림살이에 대한 관리/운여의 업무이기 때문에 후배 교인들의 계승을 장려하기 위해서 교회에 따라 은퇴제도를 설정허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24분의 은퇴장로가 있습니다. 교인으로서 새벽기도회라든지 여러 모양의 기도모임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공동기도를 하고 있지만 교회를 오랫동안 치리하다가 은퇴한 장로로서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서 어느날을 정해 놓고 공동기도의 모임을 갖자고 의견을 모아 얼마전부터 ‘은퇴장로새벽기도회’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매달 첫째 토요일 새벽에 기도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면서 기도인도를 맡고 있는데 지난 8월 첫 토요일 기도모임의 인도를 맡아 성경말씀을 준비하면서 과연 장로의 직분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자세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어야 하는지 장로의 정체성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베드로사도는 분명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에게 권하노니....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라고. 장로의 정체성은 양무리를 치는 자입니다. 베드로사도 자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전 세 번이나 주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면서 세 번 부탁하신 목양의 사역을 심령 깊숙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바로 그 것이 장로의 정체성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면 목양의 일을 어떻게 수행하여야 예수님이 바라시는 목양의 사명을 만족스럽게 달성할 수 있는지 그에 이르는 본질적이며 올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사도는 3가지의 본질적인 목양의 자세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양의 자세는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 자원함으로 하며....”, 즉 억지로 의무감에 사로잡혀 하지 말고 스스로 울어나는 마음으로 양무리를 치라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못 견딜정도로 스스로 하고 싶어서 양무리를 칠 수밖에 없는 것은 양무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순위입니다.

양무리를 사랑하게 되면 누가 하지 말라고 방해하여도 양무리를 만나고 싶고, 양무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 건저 내어 주고 싶고, 좋은 일이 있으면 양무리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고, 양무리를 화평하게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양무리에 대한 이러한 지극한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므로서 하나님의 영을 듬뿍히 받아 나의 영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양무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스스로 움트게 됩니다.

둘째 목양의 자세는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물질적인 이득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를 위하여 양무리를 치는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양무리를 섬기는 비젼의 자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지칭하신 바 삯군 목자가 아나라 선한 목자를 의미합니다.

선한 목자는 2가지의 조건을 갖춘 목자를 말합니다. 양무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고, 또한 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는 목자입니다. 양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의 어려운을 당하였을 때에 그 들의 목슴을 건지기 위하여 목자자신의 목슴을 던질 각오를 간직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들을 각각 잘 알아야 합니다. 양들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 가고 있으며,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간직하고 있는 고민과 어려움을 무엇인지, 등등을 잘 알고 있아야 합니다. 성도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을 못히고, 가족상황은 어떠한지, 갖고 있는 고민거리는 무엇인지, 희미하게 아는 것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같기도 하고, 어떻게 예수님이 부탁하신 선한 목자의 사명을 감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목양의 자세는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 양무리의 뒤에 서서 이리 저리 가라고 지시만 내리고 양무리가 가야 할 길을 재대로 인도를 하지 않는 목자가 아니라 양무리의 앞에 서서 길을 직접 인도하는 실행의 자세입니다.

얼마 전에 6.25 한국전쟁의 실전경험을 기록한 백선엽장군의 비화를 읽었습니다. 대구와 부산의 자그마한 방위선을 살신의 힘으로 방위했던 다부동전선의 전투이야기입니다. 다부동전선은 주요지역이어서 그 전선이 무너지면 대구/부산의 마지막보루가 무너지고 남한의 전지역을 북한인민군에게 넘겨 주어야하는 생명선과 같은 전선입니다.

그런데 인민군의 총공세에 비하여 한국군의 병력은 너무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 당시 사령관으로 있던 백선엽장군이 다부동전선의 열세를 보고 받았습니다. 급히 다부동전선에 달려가 보니 모든 국군장병들은 사기를 상실하고 후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백선엽장군은 권총을 빼어 들고 국군장병의 맨 앞에 나아가 다부동전선으로 진격을 했습니다. 사령관의 인도에 모근 장병들이 사기를 다시 되찾고 실로 죽기로 싸워 다부동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내고 대구/부산의 마지막 방위선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이 번창하는 세상에서의 신앙생활이란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과의 전쟁입니다. 그러한 전쟁터에서 양무리를 이끌어 나아갈 때에 뒤에서 뒷짐짓고 서서 휼륭한 전략/전술을 다짐하고 지시한다고 할 것같으면 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목양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병기를 빼어 들고 양무리의 앞장에 서서 본을 보이며 전투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승리를 양무리에게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은퇴장로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 교회의 창마다 아름다운 아침햇살이 우리의 심령을 북돋아 주고, 우리의 발길을 넓은 광야로 뻗은 먼길로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자세로, 선한목자의 비젼자세로, 그리고 본을 보이는 실행자세로, 주님의 양무리를 치는 장로가 되라고.

(백순, 미국노동성선임경제학자, 와싱톤중앙장로교회원로장로, 워싱톤침례대학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