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설교에서 채인식 목사님의 투병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날 3부 예배에 채 목사님 부부께서 참석하셨기에 목사님께 축도를 부탁드렸습니다. 키가 훤칠한 데다 여윌 대로 여위어, 제단으로 걸어 나오시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잠시 제 옆에 서 계시다가 시간이 되어 단상에 나가 축도를 하셨습니다. 그 때, 이 곳 저 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방금 설교를 통해 그분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당사자를 직접 뵈니 감격했던 것입니다. 단 위에 서 있던 저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도 그 이미지가 선명합니다. 본인의 표현처럼, 뼈에 가죽을 입혀 놓은 것 같은 앙상한 몸에 훤칠한 키 때문에 그분의 이미지가 꼭 십자가 형틀처럼 느껴졌습니다. 십자가 형틀은 참 볼품없습니다. 보기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텅 빈 채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십자가의 모습은 거룩해 보입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 목걸이나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를 보면 아무 느낌이 없지만, 거친 나무로 만든 ‘가난한 십자가’는 거룩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채 목사님의 모습이 제게는 십자가 형틀처럼 보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볼품이 별로 없지만, 그분 안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 볼품없는 몸이 오히려 은혜가 됩니다.

지난주 한국 교회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셨던 하용조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모습도 저에게는 십자가 형틀과 같은 이미지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분은 종합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병치레를 많이 하셨습니다. 간암으로 인해 받은 수술이 여섯 번이라고 하고, 지난 10년 동안 주 3일씩 투석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몸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몸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끌어 모아 일하셨습니다. 그분의 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유약한 모습입니다. 초대형 교회를 이끌고 있는 담임목사 같은 풍모가 전혀 없습니다. 마치 거칠게 만든 십자가 형틀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제게는 거룩하게 느껴집니다.

바울 사도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합니다.”(고후 12:10)라고 말했는데, 그 말씀의 뜻을 이제 좀 알겠습니다. 강한 것, 아름다운 것, 부한 것, 높아지는 것, 성공하는 것 그리고 건강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에서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를 찾는 이 시대의 풍조는 명백한 타락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는 약한 것, 추한 것, 가난한 것, 낮아지는 것, 실패하는 것 그리고 병약한 것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건강해도 감사하고 병약해져도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삶이, 우리 교회가, 그리고 저의 외형이 더욱 십자가 형틀의 모습으로 변해가기를 기도합니다. (2011년 8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