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2장14절에서 16절에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또한 사망으로 인해 흔들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증거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이 두 목적들은 상호연관을 가지고 보완적 관계를 유지한다. 적어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사탄을 제거하는 일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예수님이 "마귀를 없이 하신다"는 말씀이다. 적어도 이 점은 하나님의 ‘만물회복’(롬11:36)의 차원에서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예수님의 이 땅의 구원사역과 병행하는 또 다른 사역으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특이한 부분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 쫓으시는 장면들이다. 사복음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 특이한 행위들은 예수님 이전의 그 어떤 랍비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 특이한 행동들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이목을 끌었고 또한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축사사역과 치유사역이 인간에 대한 구속사역과 결부 된 사탄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개입이라는 신적 행위였음을 사도들이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글이나 히브리서의 지금 이 본문이나 혹은 요한 사도의 후기 글들(요16:11;요일2:8)에 비로써 마귀에 대한 심판에 대한 글들이 나타나고 있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마귀를 없이 하심"이라는 큰 주제와 중대한 관련이 있음을 사도들이 점점 인식해 가고 있었다는 역사 발전적인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본문의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셨다'는 말을 했을까? 직접적으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과 관련 있음을 본문이 말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위협하는 마귀를 없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일차적인 문맥이해를 넘어서서 좀 더 넓은 신학적 추론을 펼쳐 나가게 한다. 즉, ‘나의 구원’에 초점을 둔 중생신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자기 일’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마귀를 없이하심”(14)은 하나님의 만물회복(엡1:21,-23)과 맞물려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의 일부로 등장하게 된다.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해서 마귀에 대한 구약의 언급을 보면, 이사야의 글(사14:12-15)과 에스겔의 글(겔28:14-16)은 마귀의 기원에 관한 서설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글들이 두로 왕이나 바벨론 왕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예언들은 전통적인 예언의 이중성, 즉 예언이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사실과 또한 그 사실 너머 더 큰 사실 후 일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결국 이사야의 글이나 에스겔의 글을 단지 역사적인 한 인물들에 정착시킬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예는 마태복음 24장의 경우와 같이, 기원 후 약 70년경의 예루살렘 종말사건과 인류종말사건이 복합적으로 기술되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곧 구약의 성경기자들은 그들 왕들을 빗대어 타락한 천사를 말하고 있다. 즉 사탄의 기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천사가 다른 천사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했다는 사실을 선지자를 통해 언급하시고 있다. 마귀는 하늘나라 천사 1/3(계12:4)을 데리고 반역에 주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대로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혀로 이간질했다. 마귀(Diaboros)라고 하는 말은 이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다.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자신의 계획에 따라 만물회복을 위한 섭리와 함께,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왔으니 주께로 돌아감이라"(롬11:23)라는 원칙에 따라 상실된 것들에 대한 회복을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심은 이 원칙을 회복하신다는 신호였으며 역시 그 신호는 인간의 구원의 시작이기도 했다. 분명히 예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신탁을 통해 '때와 기한이 이르면 네게로 돌아오리라'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에 따라(창18장10,14절의 약속)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생명의 때'와 '약속의 때'에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오심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마귀로부터 구원하심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이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곧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개입이자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증되었다. 예수님은 한 손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원하시는 일을 ,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마귀를 심판하는 일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 세상에 한 번도 없었던 천군천사들의 대거 지상으로의 투입은 하나의 전쟁을 예고한다. 때문에 계시록 12장은 철장권세를 가진 아이의 탄생과 함께 하늘의 천사의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 때만해도 감히 루시퍼를 힐문할 수 없었던 미카엘 천사가(윧1:9) 새로운 힘을 얻으며 용을 하늘로부터 떨어드리고 있다. 복음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70문도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용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제 세상 임금은 쫓겨 난 것이다. 심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때문에 예수님은 성령이 이것을 가르치시리라고 말씀하신다(요16:9 이하). 우리는 “ ‘이미’(aleardy)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여 심판이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아직 아니’(not yet) 왔다”는 바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의 말을 기억하면서 마귀에 대한 이미 시작된 심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궁극적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 쫓는 예수님의 행위는 단순히 치유행위와 구원사역의 일원만이 아니었다. 곧 하나님의 나라의 침입이며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시는 하나님의 결단적인 행위인 것이다. 때문에 독일의 튜빙겐신학교의 피터 바이엘 하우스 같은 이는 오늘날 교회가 치유와 축사귀의 능력을 상실한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상실한 것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 구원의 시작이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의 시작임을 생각할 때 무한히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나라는 또 이기고 또 이기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때까지 확장되고 팽창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