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법이다. 성경의 다른 표현은 “계명, 율법, 율례, 규례, 법도, 말씀, 교훈, 증거”등 여러 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법이다. 이 법은 믿는 자들이 믿고, 따르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 이다”(시편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캄캄한 인생길,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반드시 필요한 등불이요, 빛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며, 거룩한 것이다. 만일 이 말씀에 더러움이나 때가 묻게 되면 하나님을 모독하게 된다. 요즘은 성경도 아이 폰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디지털시대가 되어서 성경이 마치 영어사전식으로 전락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지금도 성경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늘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만큼 성경책이 단지 종이로 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룩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성구(聖具)들은 늘 조심해야 한다. 아무데나 놓아서도 안 되고,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불에 태우거나 찢어서도 안 된다. 더군다나 성직(聖職)또한 그러한 것이다.

성경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가 있었다. 제사장이 아들로서 무엇이 우선되고, 나중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블레섹과의 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오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의 법궤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상자로 그 안에 십계명, 모세의 형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루가 있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것들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법궤는 곧 하나님의 현존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법궤가 전쟁에 있으면 분명히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아무리 전쟁이 급하더라도 정말 그 전쟁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먼저 기도해야 했을 것이다. 아무나 이 순신 장군의 칼을 갖고 있다고 해서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가 손오공의 주문을 외운다고 해서 양탄자가 하늘을 날겠는가? 목탁을 두드린다고 해서 스님이 되겠는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온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겠는가? 홈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대신에 먼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와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행위를 보시지 않고 믿음을 보신다. 믿음 없이 낸 많은 헌금을 보시지 않고, 작은 것이라도 정성껏 드린 믿음의 헌금을 보신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이다. 하나님은 홈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간 것을 책망하시어 그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도록 했다. 그리고 그 두 아들을 전쟁에서 죽게 했다.

아버지 엘리는 그 두 아들이 죽은 소식을 듣고 놀라 쓰러지고 말았다. 또 비느하스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들을 낳고 죽으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일들이 큰 슬픔을 가져오고 말았다. 성경은 말씀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7:6)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귀한지 알면 알수록 더욱 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가봇이 아니라 요게벳(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낳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