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2부 예배에서 설교하는 동안 아찔한 순간을 만났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를 이야기하는 동안, 말이 통하지 않아서 서로 답답했을 것이라는 대목에서 “벙어리 냉가슴”이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빌라도로 인해 답답해 하셨을 예수님의 심정을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그 말이 불쑥 제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그 말을 내뱉고 나자마자 저는 ‘아차, 실언이로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뱉은 말을 다시 집어넣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혹시나 그 표현으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이 없을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벙어리’라는 말은 장애인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한국에 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원주 지방에서 열리는 감리교 연합 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는데, 첫 날 설교 본문이 문둥병자를 고친 이야기였습니다. 설교를 한참 하고 있는데, 그 지방 감리사께서, 마치 야구 감독이 선수에게 싸인을 보내듯,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리는 몸짓을 하면서 저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머리는 둘로 나뉘어, 한 쪽으로는 설교를 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감리사께서 보내는 신호가 무슨 뜻인지를 풀고 있었습니다. 결국, 설교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 신호의 뜻도 풀지 못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야 그 신호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 지역에는 음성 나환자(전염되지 않는 나병환자)가 꽤 살고 있었고, 그 날 집회에도 그분들이 참석했던 것입니다. ‘문둥병’이라는 말은 나환자들을 비하하여 부르던 말이었기 때문에 그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저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설교하는 자리에 그분들이 와 계실 줄이야, 제가 어떻게 상상했겠습니까? 그런 줄도 모르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문둥병’이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으니, 감리사께서 발을 동동 구른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새번역> 성경에서는 ‘나병 환자’라고 고쳤습니다. 최근에는 ‘한센씨 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비수가 되어 꽂힌다면 우리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소수자와 약자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언어들에 대해 예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깜둥이’라는 표현처럼 다른 인종을 깎아내리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 밑줄을 긋고 공감한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배나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배나 더 사랑을 받아야 해.” 하나님의 마음을 잘 담아낸 표현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그 같은 표현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우리를 보시고 하나님은 매우 아파하실 것입니다. 자식의 좋지 않은 말버릇으로 인해 근심하는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님, 내 입술의 모든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바라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