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왕권을 찬탈 당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피난 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정처 없는 발길을 옮기며 외로운 유랑 생활을 하던 중 나발이라는 사람의 목장 곁에서 유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나발의 양떼를 지켜 주기도 하고 맹수들로부터 보호도 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나발의 집에서는 곡식의 추수 때와 같이 양털을 깎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때마침 좋은 날인지라 다윗은 부하들을 보내어 유랑하는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그 집의 양떼들을 돌보아 주었던 옛 정을 위해 먹을 것을 좀 얻어 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을 대하는 나발의 자세는 매우 오만불손하였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내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고기를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이 소년들에게 어찌 주겠느냐?”고 대꾸하며 떡은 주지 못 할 망정 쪽박까지 깨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부하들을 소집하여 이처럼 배은망덕한 사람은 절대로 그냥 둘 수가 없노라고 선언하고 나발과 나발의 집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응징을 받아 마땅한 나발의 소행을 거듭 천명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을 바라보면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살 때가 너무나도 많고, 자기 자신의 현실에 도취되어 교만하게 살 때가 또한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우리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올 때 이민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도 통하지 않고 직장도 없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운전면허부터 시작하여 아파트를 얻고 직장을 얻기까지 참으로 먼저 온 분들의 사랑을 많이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고생 끝에 낙이라고 돈께나 좀 벌었다고 그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높이고 은혜를 까맣게 잊고 살 때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그는 진정 그러나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삶이 이 땅에 장구하지 못하고 사람이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이 또한 유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 미국 땅에서 누가 좋은 차 타고 간다고 쳐다보며 좋은 집에 산다고 알아줍니까? 사람의 멋진 진면모는 결코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멋과 존경의 대상은 자신보다 늘 이웃을 생각하고 고생하고 소외된 분들을 의식하고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사랑을 베풀며 돕는 삶을 사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말에도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고 했던 것입니다.
며칠 전 저는 한 분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작은 스몰비지니스를 하는 어린 아이 같이 맑은 가슴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제 사무실을 찾아 와서는 제법 묵직한 상자 하나를 내려놓고 갔습니다. 그 속에는 들고 온 자기 자신도 모르는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매일 가게 문을 열고 나서 처음 들어오는 손님의 매상을 이 상자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정성을 이렇게 준비해 보았노라고 수줍어하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네 삶이 모두 이렇게 사랑과 정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참으로 이 세상이 천국같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저마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작은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한 결 같이 속 사람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먼저 챙기는 모진 욕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는 넓게 미국 정치의 중심부와 한국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도 동일합니다. ‘남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는 절박한 현실 속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저마다 자기는 옳고 상대는 나쁘다는 논리로 싸우고 또 싸우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만 지각이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터인데 말입니다.
짧은 인생 다 살고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산 사람의 퓨너널 홈에는 과연 몇 사람이나 찾아와 슬퍼하겠습니까? 바로 그 때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먼 훗날 나의 장례식에는 과연 몇 사람이나 찾아와 나를 추억하며 아쉬워하겠는가?”를 말입니다.
얼마 전 추기를 보낸 영국 왕태자비 다이애나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시시때때로 사회사업과 불우 이웃돕기에 헌신적으로 앞장섰기 때문이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서산에 혼자 지는 석양처럼 우리들도 언젠가는 쓸쓸하게 혼자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올 것인데 그 때 뒤돌아보며 후회하지 않도록 나 외에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이 외로우면 그보다 더 불쌍한 인생은 없을테니까 말입니다.
[최인근 컬럼] 은혜를 망각하고 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삶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