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하다’는 원래 ‘야위거나 메말라 살갗이나 털이 윤기가 없고 조금 거칠다.’의 뜻이다. 소설가 황순원의 글에 “수염을 깍지않아 까칠한 남자”란 표현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전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의미로 사용된다. 대충 차갑고 메마르고, 사소한 일에 딴지 잘 거는 행동을 ‘까칠하다’라고 한다.

“걔 참 성격 까칠하데.”에서 ‘까칠하다’는 자기가 생각하는 정당한 일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공격할 때 쓴다. “그냥 넘어가면 좋을 걸 왜 자꾸 나에게 까칠하게 구는데?”에서 ‘까칠하다’는 어떠한 말이나 행동이 조금 거친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대하기 어렵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까칠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일단 반대하고 보는 행동이라고 보면 과히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독불장군이기 쉬워서 친구가 되기 쉽지 않다. 소위 외통수들이다.

그런데 이 까칠하다는 동사가 까칠남이란 명사로 둔갑하게 되면 이 단어의 의미가 換骨脫退의 지경에 이르게 되어 현대 여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니 참 알다가 모를 세상이다. 까칠남은 까칠한 남자의 준말로서 조금 멋있는 배우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까칠남이라 부르기를 주저치 않는다. 요즘은 여기서 한걸음 더 진화한 ‘까도남’ 즉 까칠한 도시남자를 뜻한다고 하니 국어순화 운동은 완전히 물건너 간 것이 아닐까!

이렇게 신조어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까칠남의 역기능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까칠남이나 까칠녀들은 어떤 공동체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오늘의 사회는 까칠이들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까칠이들은 사회를 부패하지 않게 하고 정화시키는 좋은 역기능을 가진 까닭이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일정한 까칠이들이 있어야 고인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소위 포퓰리즘을 향하여 NO!라고 대드는 까칠한 의원들을 나는 존경한다. 대학 반값 등록금 문제를 정면에서 비판한 까칠녀 국회의원에게 찬사를 보낸다. 다수를 점한 시의원들에게 맞서 전아동 무료급식에 NO!라 할 수 있는 까칠남 시장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왜 모든 교인들이 순한 양이 되어야 하나 염소도 있어야 한다. 염소의 역기능을 무시한 까닭에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지혜로운 목자는 오히려 양무리에 염소들을 풀어 놓아 양들이 비만화 되는 것을 막는다. 양들만 있는 목자는 목양이랄 것도 없다. 염소들이 있어야 때로 양들의 귀중성을 알고 부지런하게 양떼를 지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적지도자들이 까칠이들나 염소들을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미운오리새끼로 취급해 쫓아버린다. 이는 역기능없이 순기능만으로 해보겠다는 어리석음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잘못된 순종론을 전가보도로 사용한 까닭에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양들만을 선호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까칠이나 염소에게는 좋은 역기능이 있다. 현명한 영적지도자들은 염소들을 양으로 까칠이들을 훈남이들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언제나 수많은 까칠이들에게 문호개방한다. 그래야 나태하지 않고 항상 긴장하여 자신의 일을 돌아보게 되는 까닭이다. 이런 좋은 역기능을 은퇴의 문턱에서나 깨달았으니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