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흐름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반동 작용의 법칙이다. 역사는 중용을 허용치 않고 극좌에서 극우로 오가는 진자운동(侲子運動)을 계속하고 있다.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으나 피부에 와닿는 예를 든다면 한국에서 제자훈련이 이성주의로 흘러 가분수적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게 되자 그 반작용으로 성령운동이 파상적 공세를 취하여 감성주의적 신앙을 부추기는 면이 없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복음의 역사는 끊임없이 진전하고 있다. 이것은 가히 신비한 일이다. 금년 들어 워싱턴 목연원에서는 포스트모던니즘 사상에 대한 집중적 연구를 통하여 이 사상이 기독교뿐 아니라 인간 전 생활 분야에 어떻게 침투하여 그 심층을 파괴하는지를 보고 전율한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도 또 하나의 유행일 뿐 그것이 역사의 유물로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 같은 것은 가족의 재결속과 신 공동체의 출현이라는 선물을 안겨주는 반동의 스프링 역을 감당하리라고 능히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이 역사의 범주안에 있는 까닭이다. 오히려 이런 도전들은 복음의 전진의 불쏘시개감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이슬람이 오일머니를 앞세워 전 세계를 유린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 또한 신기루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들이 무제한적 신생아 출산으로 유럽을 북미주 대륙을 심지어 극동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까지 넘본다 하여도 그것은 복음 전진의 일개 도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에집트에서 리비아에서 민주화 바람이 부는 것은 뛰어난 수학자라도 풀지 못할 함수관계인 때문이다.

한국에서 스쿠류법 저지에 기독교가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비록 한국 기독교가 물량성장주의에 빠져 허덕였지만 이제 서서히 기독교 본질 회복으로 선회하는 조짐이 보인다. 한기총을 해체하라고 한 노교수가 총대를 멘 일이나, 그 대상이 대통령의 무릎을 꿇게 한 일도 역시 역사의 반동의 한 점을 찍은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급박한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복음의 전진은 거대한 희생의 표면장력(表面張力)속에 있다는 것이다. 순교의 테이프가 끊어지는 순간 겁잡을 수 없는 신 예루살렘 행진은 가차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순교의 태풍을 머금은 비구름이 잔뜩 몰려오고있는 때이다. 복음은 그 어떤 역사의 반동 속에서도 거침없이 전진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가로 막을 자가 없다. 하물며 포스트모던니즘 따위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