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TV 프로그램이 바로 “나가수”다. 그 인기가 인터넷에서도 폭발하니, 무슨 일인가 살펴보았다. 과학의 덕분으로 이제는 세계 어디에서나 한국과의 실시간 정보 교환이 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 사용자에 따라서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나가수”를 보면서 매우 신선한 도전을 받았다. 가수들의 뿜어내는 가창력과 열정, 창조성, 화려한 무대, 그리고 함께 돕는 자들의 반응과 청중 단의 반응, 경쟁자들의 반응과 고민을 담아내는 편집으로 국민들과 소통을 이룬 일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시대를 거꾸로 되돌려 놓은 사건이라고 본다. 온 국민들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프로그램의 기획이야말로 역사를 창조하는 행위인 것이다. 한두 사람의 기획과 생각이 이처럼 국민들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감동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기립박수를 치게 할 정도로 감동시킨 일이 놀라운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얼마나 고민하고 연구하였을까를 생각하면 그들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특별한 변화도 즐거울 일도 없는 사역지 생활에서 이러한 일로 인하여 생동감을 느끼며 감동을 받게 되니 재미있기도 하고, 또한 많은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일반은총이 아닌가?
필자는 보수주의 환경에서 자라 다양성을 경험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경건을 강조하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영향인지, 찬송가 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 가수들이 부르는 것들 중에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필자를 감동시킨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하면서 무엇인가를 도전해 본다.
첫째, 그들의 열정이다.
필자는 어디에서 어떤 일로 목이 터지도록 핏발이 서도록 열정을 다해 소리를 쳐보았는가? 어떤 문제로 밤잠도 못 자면서 고민하며 경쟁을 위한 준비를 해 보았는가? 무슨 일에 나의 모든 힘과 능력과 시간을 쏟아 부어 헌신해 보았는가? 어떤 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까지 고민하고 도전해 보았는가?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영혼을 불어넣어 목이 쉬도록 말씀을 전한 것도 기억이 까마득하다. 문득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목사나 선교사들이 한 주제를 가지고 5분 설교 경연을 벌인다면 어떨까? 보수주의는 말씀을 가지고 하면서 호통을 칠 것이다. 아니면 너무 진보적인가?! 이러한 일에 필자는 세속적인 것도 진보적인 것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런 도전이 갱신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된다면, 거룩함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한번 시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가난한 시절, 성공과 축복인 부(富)를 희망하며 열심을 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 있고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시절을 지나고 보니 열정도 뜨거움도 애절함도 사라지고, 헌신과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는 무관심한 안정감, 불편함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편리함과 세속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 이제는 교회가 세속 문화의 종속자가 되어 버렸다. 과거에는 교회가 세상의 길잡이고 도전을 주며 사회를 선도하였지만 지금은 사회에 모든 변화의 주도권을 내어줬다.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사회의 기초 윤리규범을 따르기에 노력하여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열정은 감정의 표현이다.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잃어버렸지 않는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둘째,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본연의 고정된 패턴을 과감하게 바꾸어 시도하는 모습은 매우 신선하다. 자신만의 색과 음, 그리고 스타일을 변형한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행위이다. 자신과 느낌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른 한 곡을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모습 속에서 그들의 변화를 위한 창조성은 참으로 탁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마 이를 지켜보는 모두가 동일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세상을 노래하는 이들이 이처럼 노력하며 창조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무엇에 이처럼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하는가?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생각과 개인의 삶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에 재미가 있다. 에벌레가 자신의 껍질을 벗어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자신의 음과 색을 고집하였던 이들은 결국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고 만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변화이다. 자신만의 안정된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세계를 확장하는 과감한 선택이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우리는 살아간다.
변화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나 선교부, 교회나 선교사들, 보수를 가장하여 전통과 자신의 교리나,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고수하려는 것도 축복이 아닌, 이제는 깊이 고민하여야 하는, 시대가 던져주는 과제가 된 것이다.
변화란 고정관념을 깨어야 한다. 기존의 기득권이나 명성도 버려야 한다. 안정이라는 것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이것이 변화의 기본이다. 변화에 둔감하였던 국민가수 김건모가 탈락의 쓴잔을 마신 것은 과거의 성공공식에 갇혀 시장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늘 새로워져야 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가장 변화에 둔감한 것이 세계를 누비는 선교사들인가? 한국교회의 현장에 서있는 목사들인가? 나의 사역현장에서 진하게 느끼는 결론이다.
셋째, 퇴출 규칙이다.
나가수가 인기와 세인들의 관심을 일으키는 이유 중의 하나는 퇴출이라는 규칙 때문이다. 퇴출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중견가수들도 손가락을 떨게까지 긴장시키는 일, 마이크를 잡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목사나 선교사는 한번 임명받으면 만년지기이다. 목회에 관심이 없는 게으른 목사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너절한 설교를 하는 목사도, 성도들을 리드할 만한 아무런 것이 없어도, 돈에 눈이 멀고 이성에 정신이 몽롱한 목사나 선교사도, 성직이라는 이유로 퇴출이라는 것이 없어 10년 20년 피차 지겹고 피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부담을 가지고 한 목회자를 먹여 살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적으로는 큰 은혜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목사는 은퇴 이후에 실버 선교사로 나오면 더욱 더 환영받는다. 평생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 측면에서는 대단히 좋은 것이지만, 살기 위한 수단이라면 시대착오적인 증거가 아닌가?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라면, 퇴출이 없기에 긴장이 없고 발전도 없고 정의나 진리도 없이 쇠락하여가는 것이다. 특별한 실수가 없으면 나가라는 경우도 드물다.
요즘은 교회가 몇몇 사람들의 마음에 안 들면 목사를 아주 쉽게 내어쫓는 일이 흔해졌지만, 일반적으로 퇴출이라는 것은 없다. 어떤 규칙 말이다. 사실 말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역자가 세속화되는 이유가 아닌가?
퇴출이라는 것은 물고기가 가득한 곳에 메기를 집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도록 하는 일이다. 서로가 사는 방법인 것이다. 종종 가까운 동료들과 만나면 서로에게 질문하는 말, 너는 왜 여기 있니?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 있나?! 교만한 질문들을 나눈다.
넷째, 끝없는 고민과 도전이다.
나가수들의 경쟁과 연주자들의 경쟁 편곡 자들의 아이디어 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제 보여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가수들이나 청중들이 모두 지쳐가는 상황에 빠졌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
이 탈출구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고 어떤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느냐의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창조성을 가지고 도전하면 더 없는 즐거움을 모두에게 선사하고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용두사미가 될 수도 있다. 지켜볼 만한 흥미로운 일이다.
나 목사, 나 선교사, 주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과 대가를 지불하기 위하여, 미래 사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사람을 키우기 위하여 불꽃 티는 아이디어를 짜고 있기는 하는가? 나가수는 피를 말리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더욱 더 다양성이 인정받는 사회로 만들어 가며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 세대에 폭탄을 던져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과 도전, 이것이 나 가수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Sergei(모스크바 선교사)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나가수”를 보면서 매우 신선한 도전을 받았다. 가수들의 뿜어내는 가창력과 열정, 창조성, 화려한 무대, 그리고 함께 돕는 자들의 반응과 청중 단의 반응, 경쟁자들의 반응과 고민을 담아내는 편집으로 국민들과 소통을 이룬 일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시대를 거꾸로 되돌려 놓은 사건이라고 본다. 온 국민들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프로그램의 기획이야말로 역사를 창조하는 행위인 것이다. 한두 사람의 기획과 생각이 이처럼 국민들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감동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기립박수를 치게 할 정도로 감동시킨 일이 놀라운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얼마나 고민하고 연구하였을까를 생각하면 그들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특별한 변화도 즐거울 일도 없는 사역지 생활에서 이러한 일로 인하여 생동감을 느끼며 감동을 받게 되니 재미있기도 하고, 또한 많은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일반은총이 아닌가?
필자는 보수주의 환경에서 자라 다양성을 경험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경건을 강조하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영향인지, 찬송가 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 가수들이 부르는 것들 중에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필자를 감동시킨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하면서 무엇인가를 도전해 본다.
첫째, 그들의 열정이다.
필자는 어디에서 어떤 일로 목이 터지도록 핏발이 서도록 열정을 다해 소리를 쳐보았는가? 어떤 문제로 밤잠도 못 자면서 고민하며 경쟁을 위한 준비를 해 보았는가? 무슨 일에 나의 모든 힘과 능력과 시간을 쏟아 부어 헌신해 보았는가? 어떤 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까지 고민하고 도전해 보았는가?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영혼을 불어넣어 목이 쉬도록 말씀을 전한 것도 기억이 까마득하다. 문득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목사나 선교사들이 한 주제를 가지고 5분 설교 경연을 벌인다면 어떨까? 보수주의는 말씀을 가지고 하면서 호통을 칠 것이다. 아니면 너무 진보적인가?! 이러한 일에 필자는 세속적인 것도 진보적인 것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런 도전이 갱신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된다면, 거룩함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한번 시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가난한 시절, 성공과 축복인 부(富)를 희망하며 열심을 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 있고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시절을 지나고 보니 열정도 뜨거움도 애절함도 사라지고, 헌신과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는 무관심한 안정감, 불편함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편리함과 세속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 이제는 교회가 세속 문화의 종속자가 되어 버렸다. 과거에는 교회가 세상의 길잡이고 도전을 주며 사회를 선도하였지만 지금은 사회에 모든 변화의 주도권을 내어줬다.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사회의 기초 윤리규범을 따르기에 노력하여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열정은 감정의 표현이다.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잃어버렸지 않는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둘째,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본연의 고정된 패턴을 과감하게 바꾸어 시도하는 모습은 매우 신선하다. 자신만의 색과 음, 그리고 스타일을 변형한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행위이다. 자신과 느낌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른 한 곡을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모습 속에서 그들의 변화를 위한 창조성은 참으로 탁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마 이를 지켜보는 모두가 동일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세상을 노래하는 이들이 이처럼 노력하며 창조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무엇에 이처럼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하는가?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생각과 개인의 삶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에 재미가 있다. 에벌레가 자신의 껍질을 벗어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자신의 음과 색을 고집하였던 이들은 결국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고 만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변화이다. 자신만의 안정된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세계를 확장하는 과감한 선택이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우리는 살아간다.
변화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나 선교부, 교회나 선교사들, 보수를 가장하여 전통과 자신의 교리나,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고수하려는 것도 축복이 아닌, 이제는 깊이 고민하여야 하는, 시대가 던져주는 과제가 된 것이다.
변화란 고정관념을 깨어야 한다. 기존의 기득권이나 명성도 버려야 한다. 안정이라는 것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이것이 변화의 기본이다. 변화에 둔감하였던 국민가수 김건모가 탈락의 쓴잔을 마신 것은 과거의 성공공식에 갇혀 시장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늘 새로워져야 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가장 변화에 둔감한 것이 세계를 누비는 선교사들인가? 한국교회의 현장에 서있는 목사들인가? 나의 사역현장에서 진하게 느끼는 결론이다.
셋째, 퇴출 규칙이다.
나가수가 인기와 세인들의 관심을 일으키는 이유 중의 하나는 퇴출이라는 규칙 때문이다. 퇴출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중견가수들도 손가락을 떨게까지 긴장시키는 일, 마이크를 잡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목사나 선교사는 한번 임명받으면 만년지기이다. 목회에 관심이 없는 게으른 목사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너절한 설교를 하는 목사도, 성도들을 리드할 만한 아무런 것이 없어도, 돈에 눈이 멀고 이성에 정신이 몽롱한 목사나 선교사도, 성직이라는 이유로 퇴출이라는 것이 없어 10년 20년 피차 지겹고 피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부담을 가지고 한 목회자를 먹여 살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적으로는 큰 은혜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목사는 은퇴 이후에 실버 선교사로 나오면 더욱 더 환영받는다. 평생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 측면에서는 대단히 좋은 것이지만, 살기 위한 수단이라면 시대착오적인 증거가 아닌가?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라면, 퇴출이 없기에 긴장이 없고 발전도 없고 정의나 진리도 없이 쇠락하여가는 것이다. 특별한 실수가 없으면 나가라는 경우도 드물다.
요즘은 교회가 몇몇 사람들의 마음에 안 들면 목사를 아주 쉽게 내어쫓는 일이 흔해졌지만, 일반적으로 퇴출이라는 것은 없다. 어떤 규칙 말이다. 사실 말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역자가 세속화되는 이유가 아닌가?
퇴출이라는 것은 물고기가 가득한 곳에 메기를 집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도록 하는 일이다. 서로가 사는 방법인 것이다. 종종 가까운 동료들과 만나면 서로에게 질문하는 말, 너는 왜 여기 있니?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 있나?! 교만한 질문들을 나눈다.
넷째, 끝없는 고민과 도전이다.
나가수들의 경쟁과 연주자들의 경쟁 편곡 자들의 아이디어 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제 보여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가수들이나 청중들이 모두 지쳐가는 상황에 빠졌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
이 탈출구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고 어떤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느냐의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창조성을 가지고 도전하면 더 없는 즐거움을 모두에게 선사하고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용두사미가 될 수도 있다. 지켜볼 만한 흥미로운 일이다.
나 목사, 나 선교사, 주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과 대가를 지불하기 위하여, 미래 사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사람을 키우기 위하여 불꽃 티는 아이디어를 짜고 있기는 하는가? 나가수는 피를 말리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더욱 더 다양성이 인정받는 사회로 만들어 가며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 세대에 폭탄을 던져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과 도전, 이것이 나 가수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Sergei(모스크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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