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끼친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나무 판넬에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담과 이브와 수많은 동물을 담은 낙원과 지상의 쾌락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죄인들을 향하여 공상의 징벌을 묘사하여 지옥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그 작품의 제목은 “세속적 쾌락 동산”이다. 그 작품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서 가지는 치명적인 7가지의 죄가 묘사된 것이다. 그 죄의 항목들은 분노(Wrath), 교만(Pride), 색욕(Carnal), 나태(Sloth), 폭식(Gluttony), 탐욕(Greed), 질투(Envy)로 이것들의 내면의 공통점을 본다면 그것은 누군가 무엇인가를 가질려고 하는데 그것에 만족을 얻지 못하거나 너무 많은 것을 갖게 될때 7가지의 죄성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삶의 만족도를 채우기 위해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중심에 서있는 것들이 돈, 지식, 명예등이다. 이러한 것들이 삶에 있어서 행복과 만족을 이루는데 하나의 도구일뿐인데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기에 그 속에서 절대적인 행복과 기쁨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삶의 도구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려 그것이 무거운 중압감으로 느껴져도 그 무거운 짐을 결코 내려 놓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참다운 기쁨, 참다운 만족, 참다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늘 불안하고 누군가 나의 것을 빼앗을까 염려와 두려움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강아지를 키우다 보면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강아지들이 “개 뼈다귀”를 보면 그것들을 본능적으로 자신만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느 구석진 곳이나 담요 밑에 숨기는 것을 볼 수있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어디에다 두었는지도 모르고 “숨겨 놓은 뼈다귀”를 찾을 수 없으면 그것을 끙끙대고 찾아 돌아 다니거나 어떤 경우는 자신이 숨겨놓은 것을 잊어버린다. 그런 강아지를 보면서 바보스런 강아지에게 그냥 나누면 될 걸 뭐하러 숨겨 놓고 찾느냐라고 말을 하고 강아지가 불쌍하여 숨겨진 뼈다귀를 찾아다 주는데 찾아주면 그것을 또 어디엔가 숨겨두려고 헤매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아지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개 뼈다귀”를 그냥 나두면 누군가 그것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유아원을 들여다 보면 자신이 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장난감 하나를 가지고 오는데 그것을 어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자신의 손에서 절대 놓으려 하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내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아원에 가면 자기 자신이 소유한 장난감 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못하여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없게된다. 만일 그가 자신의 것을 “내려 놓고” 다른 것을 가지고 논다면 그 사이에 누군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려 놓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삶에서 “내려 놓음”이란 나를 비우는 것인데 이것은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힘은 바로 하나님을 통해 내려 놓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면 “행복한 기쁨의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데로 자신을 내려놓아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을 말하라면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식솔들과 조카 롯의 식속들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헤어지는 과정에서 조카 롯에게 말하기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때 롯은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가 택한 곳은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답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렇게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삶의 위기에 처해 있을때 그를 구하고 싸움에서 승리하지만 그 승리로 인해 어떤 전리품이나 보상 받기를 거절한다. 이는 인간적 자원에 아브라함이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이 그의 유일한 공급자라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상충될때 사람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른 것이다. 이것이 곧 “내려놓음의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내려 놓음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삶의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은 안전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최근에 필자의 교회에서 28일 동안 월요일에서 주일까지(오후8-10) 사도행전에 맞추어 초대교회의 본질의 회복과 영성회복을 위해 기도하는데 가장 은혜 스러운 찬양의 하나를 들자면 “내가 주인 삼은” 곡으로 그 가사를 보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 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해 주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 인생은 나그네의 삶이며 특별히 정착과 삶의 안정을 찾기 어려운 이민자의 삶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없는 삶은 현실로 주어지는 경제적, 건강, 가정에 대한 거칠은 고난과 역경의 폭풍을 맞게 되면 쉽게 무너지고 자포자기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을 내려놓고 삶을 맡길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세상이지만 그것은 움켜 잡으려고 하면 할 수록 나를 소멸의 구덩이와 공허한 늪으로 빠져가게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는 성령님을 주인으로 삼고 모든 것을 그 분에게 “내려 놓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분이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던 “기쁨과 삶의 감격”을 날마다 주실 것이다. 삶의 행복은 내 것을 내려 놓을수록 가득해지는 것이며 나의 미래의 계획까지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면 마음의 평안과 삶이 안전하다는 것을 신앙안에서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영원한 삶이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삶의 만족도를 채우기 위해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중심에 서있는 것들이 돈, 지식, 명예등이다. 이러한 것들이 삶에 있어서 행복과 만족을 이루는데 하나의 도구일뿐인데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기에 그 속에서 절대적인 행복과 기쁨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삶의 도구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려 그것이 무거운 중압감으로 느껴져도 그 무거운 짐을 결코 내려 놓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참다운 기쁨, 참다운 만족, 참다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늘 불안하고 누군가 나의 것을 빼앗을까 염려와 두려움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강아지를 키우다 보면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강아지들이 “개 뼈다귀”를 보면 그것들을 본능적으로 자신만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느 구석진 곳이나 담요 밑에 숨기는 것을 볼 수있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어디에다 두었는지도 모르고 “숨겨 놓은 뼈다귀”를 찾을 수 없으면 그것을 끙끙대고 찾아 돌아 다니거나 어떤 경우는 자신이 숨겨놓은 것을 잊어버린다. 그런 강아지를 보면서 바보스런 강아지에게 그냥 나누면 될 걸 뭐하러 숨겨 놓고 찾느냐라고 말을 하고 강아지가 불쌍하여 숨겨진 뼈다귀를 찾아다 주는데 찾아주면 그것을 또 어디엔가 숨겨두려고 헤매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아지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개 뼈다귀”를 그냥 나두면 누군가 그것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유아원을 들여다 보면 자신이 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장난감 하나를 가지고 오는데 그것을 어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자신의 손에서 절대 놓으려 하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내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아원에 가면 자기 자신이 소유한 장난감 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못하여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없게된다. 만일 그가 자신의 것을 “내려 놓고” 다른 것을 가지고 논다면 그 사이에 누군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려 놓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삶에서 “내려 놓음”이란 나를 비우는 것인데 이것은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힘은 바로 하나님을 통해 내려 놓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면 “행복한 기쁨의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데로 자신을 내려놓아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을 말하라면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식솔들과 조카 롯의 식속들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헤어지는 과정에서 조카 롯에게 말하기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때 롯은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가 택한 곳은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답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렇게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삶의 위기에 처해 있을때 그를 구하고 싸움에서 승리하지만 그 승리로 인해 어떤 전리품이나 보상 받기를 거절한다. 이는 인간적 자원에 아브라함이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이 그의 유일한 공급자라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상충될때 사람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른 것이다. 이것이 곧 “내려놓음의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내려 놓음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삶의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은 안전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최근에 필자의 교회에서 28일 동안 월요일에서 주일까지(오후8-10) 사도행전에 맞추어 초대교회의 본질의 회복과 영성회복을 위해 기도하는데 가장 은혜 스러운 찬양의 하나를 들자면 “내가 주인 삼은” 곡으로 그 가사를 보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 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해 주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 인생은 나그네의 삶이며 특별히 정착과 삶의 안정을 찾기 어려운 이민자의 삶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없는 삶은 현실로 주어지는 경제적, 건강, 가정에 대한 거칠은 고난과 역경의 폭풍을 맞게 되면 쉽게 무너지고 자포자기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을 내려놓고 삶을 맡길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세상이지만 그것은 움켜 잡으려고 하면 할 수록 나를 소멸의 구덩이와 공허한 늪으로 빠져가게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는 성령님을 주인으로 삼고 모든 것을 그 분에게 “내려 놓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분이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던 “기쁨과 삶의 감격”을 날마다 주실 것이다. 삶의 행복은 내 것을 내려 놓을수록 가득해지는 것이며 나의 미래의 계획까지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면 마음의 평안과 삶이 안전하다는 것을 신앙안에서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영원한 삶이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