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시대의 신학자들 중에는 다원주의는 부정하지만 보수 정통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다양성을 수용하라는 중도신학을 표방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다양성(多樣性, diversity)은 ‘하나의 진리나 실체에 다양한 측면이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현실적 사고로서, 인간 이해의 제한성과 상황적 적용성을 수용하는 겸손한 인간의 모습이다.’라고 강변한다. 이것이야 말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경적 예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사용했던 아디아포라(a-diaphora)를 들고 나온다. ‘아디아포라’ 란 다른 (in-difference,) 견해를 가져도 관계없다는 뜻으로, 의견 차이가 있을 때는 신앙양심의 자유에 근거해서 결정하고 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한 모두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일견 매우 그럴싸 한 논리이다.

그러면 이 아디아포라 시스템이 교회역사에 어떤 긍정적 결과를 낳았는가 하는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초대 로마 가정 교회안에는 벌써 율법주의(legalism)를 비판하고 음식문제에 자유로운 신앙인들이 있었으며 바울은 아디아포라를 사용해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과연 음식문제에 까다로웠던 유대계 신자들만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이 아디아포라 정신이었을까? 이방계 신자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면 음식문제에 까다로웠던 유대계 신자들을 포용하는 것이 아디아포라 정신이 아닐까?

왜 이런 어필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지나친 양해와 중도정신이 기독교 윤리를 훼손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까닭이다. 듣자 하니 진리가 자유케 했는데 무슨 성수주일이며, 주초금지인가 하면서 방자한 일을 서슴치 않는 몰지각한 신앙인들이 있다고 하니 하는 말이다. 믿는 다는 사람들이 노래방에서 술마시고 자유를 만끽했다면 과연 그것이 아디아포라를 잘 적용한 것인가 하는 말이다. 그들이 ‘위하여’ 를 합창했다면 ‘主를 위하여’인가 ‘酒를 위하여’인가? 목사가 설교하면서 술마시거나 담배피우는 것이 죄가 아니요 각자의 신앙양심이 결정할 일이다 라고 당당하게 했다면 그 분은 아디아포라적 설교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아디아포라의 다른 한편인 기독교 윤리에는 실패한 것이다. 담배피우는 남편이 그것보라고 의기양양해서 잘 믿는 부인을 욱박지르게 될 것이다.

강남의 유명한 설교자가 주일에 등산가방을 메고와도 예배에만 참석하면 된다고 획기적인 설교를 해서 인기절정이었다. 그 결과가 빚은 그 교회의 형편은 세인이 다 잘 아는 바이다. 이런 이야기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었던 저녁예배를 폐하고 오후예배로 대거 전환 한 결과는 어떤가? 또 아디아포라를 거들먹거리면서 교파나 교단의 정체성을 나무라며 하나가 되자 하는 사람들은 아디아포라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회복해야 한다면서 WCC나 NCC나 한기총이나 복음주의 협의회니 하면서 계속 늘어나는 것은 오히려 아디아포라를 잘 못 적용하는 까닭이다. 아디아포라의 딜렘마에서 벗어나려면 일방을 두둔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높은 신앙 윤리를 저버려서는 아디아포라의 논리는 헛수고이다. 아디아포라의 딜렘마에서 탈출하는 것은 역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뿐이다, Sola Scriptu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