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성경관

(마태복음)마타이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내가 토라나 예언서를 폐하러 왔다고 생각지 마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다.)
18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에는 토라의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있을 것이다.
19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거나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아주 작다고 불릴 것이고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고 불릴 것이다.
20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파루쉬인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옹아리를 하거든 히브리어와 쉬마와 토라를 가르쳐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안한만도 못할 것이다. 아마 이 말이 이스라엘 교육의 근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한 가지 제가 발견한 사실은 유대인들 특히 정통 유대인들은 성경에 대하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심이었고 그런 열심인 문화가 완전히 정착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정통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탈무드 학교에 들어가서 구약성경과 탈무드를 중심으로 공부를 합니다. 이중에서 공부도 잘하고 성경을 잘 아는 아이들이 나중에 랍비가 됩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 나중에 교수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수는 성경이 거의 머리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성경의 자음과 모음과 악센트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 구약교수가 되면 사실상 기독교 사회에서 교육받은 사람들과는 시합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지금 구약계는 유대인들이 다 잡고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성경문화는 4000년이나 되니 우리나라의 120년 전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120년 정도밖에 안된 기독교가 이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가 보았던 이 성경에 대한 두 사회의 차이 즉, 한국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자세와 이스라엘 정통유대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자세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는 전혀 인식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선교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고 구원시켜야만할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보다 성경에 대한 중요성이나 열의나 사랑이 훨씬 적다면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께 이 문제를 놓고 한번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내가 토라나 예언서를 폐하러 왔다고 생각지 마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개역성경에서는 토라나 예언서를 율법이나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신약을 번역하게된 다섯 가지 이유가 신약책 머리말에 나와 있는데 그중 첫 번째 입니다. 개역성경의 문제는 또한 선지자란 번역에 있습니다. 선지서 또는 예언서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타나크라고 합니다. 타나크는 토라 네비임 케투빔의 두 문자 티긑과 니은과 키읔를 합성하여 만든 것입니다.

토라는 모세오경을 말하고 네비임은 선지서 곧 예언서를 말하고 케투빔은 시가서를 말합니다. 따라서 타나크라고 할 때에는 모세오경과 에언서와 시가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구약성경은 이 히브리어성경에서 나왔습니니다. 따라서 이 타나크라하면 우리가 보는 모든 구약성경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구약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신약성경은 당연히 아직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그 시대의 성경이었던 구약성경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폐하다’ ‘이루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페르’ ‘말레’라는 단어인데 ‘하페르’는 ‘어기다’는 뜻이고 ‘말레’는 ‘완전히 순종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내가 성경말씀을 어기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해석하고 순종하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그 시대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지켰던 것과는 다른 해석을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이 산상복음 5장 6장 7장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살인의 정의를 마음속에 미운 마음만 가졌어도 살인이라고 하였으며 간음의 정의를 마음속에 음욕을 품기만 하였어도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죄의 기준은 그 시대의 유대인들의 관습과 비교하여 훨씬 엄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여서 잘 지키고 있는데 네가 나와서 기존 질서를 흔들려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경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성경말씀을 어기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완전하게 해석하고 그렇게 지키고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예수님과 같이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하고 그대로 순종하여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삶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글에 18절 계속)

이글은 말씀의 집 www.hebrew.pe.kr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요한의 풍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