齊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고 대답하였다. 이는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 라는 뜻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권리와 인권은 평등한 것이다. 비록 타락한 인간에 의해서 개개인의 권위와 자유는 속박 당하고 불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애초부터 동등하였다.

그러면 사람이 동등한 인권을 가졌기에 역할까지도 같아야하는 것인가? 물론 현실적을 그러할 수도 없지만 그러하지도 않다. 도무지 혼란스러워 사회가 유지될 수가 없을 것이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로 혼란에 휩싸여 제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선출된 대통령의 권위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대통령 역시 자신의 직책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서민의 삶에 대한 동경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회와 국가는 성장은 커녕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집안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가장이 있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잘 꾸려나가는 주부가 건재하고, 자식은 자식으로서 집안의 미래를 책임질 재목으로 성장해 나간다면 그 곳에 건강한 미래가 있고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많은 시간을 남편이 앞치마를 두른다거나, 아내가 아침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직장과 사업의 일로 분주하고 자식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만을 고집한다면 그 곳에서 무슨 감사와 기쁨이 있을 것이며 소망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을 분명히 하셨다.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하고 아내는 남편에 순종해야하는 의무가 각자에게 지워졌다(엡 5:22-25). 이는 물론 아내의 열등함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 속에 도움의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그것에서 선을 이루려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목사, 장로, 집사 등 각 직분자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앙 인격을 지녔다. 그러나 그 역할까지도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부 교회에서는 목사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장로가 있고 심지어 집사까지도 있었던 것 같다. 무능해 보이는 목사를 도우려는 관심과 열정이 지나쳐 결과적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렵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뿐만 아니라 교회가 갈라지고 문을 닫게하는 최악의 결과 까지도 우리는 간간히 보아 오고 있다. 필자도 아주 오래전에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옥한흠 목사님의 글을 밤새 읽고 얼마나 많은 도전을 받았던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역 중에 소명받고 목사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생각해 보건데, 아무리 경건한 장로라도 목사의 마음과 책무에 대하여 잘 알기란 쉽지않고, 똑똑한 집사라도 장로의 심중과 책임감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평신도 과정을 겪고 온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목사도 교인 개개인의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찌 각자에게 맡겨진 소명에 월권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선의로 시작된 열심이 지나쳐 질서가 흔들린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고, 행복해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볼 수도 듣지도 못했던 것이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내 직책에 충실하고, 중임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을 도우는 헌신의 삶을 부단히 감당할 때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고, 하나님과 나는 기쁨이 넘치는 것이 아닐까.

인권이 동일하다고 역할까지 동일한 것은 아닐 줄 안다. 희랍 소크라테스 시대에 논제의 주류를 이룬 ‘너 자신을 알라’가 소크라테스의 상징적 명언이 되었는데 오늘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현대인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남편을 가장답게 돕는 아내,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 사랑함 같이 하는 남편, 주안에서 부모에게 절대 순종하는 자녀들, 목사 섬기기를 주님 섬기듯 하는 장로, 장로에게 순종하기를 어버이 섬기듯하는 목사와 집사들 그리고 신자들, 이런 사랑과 섬김의 질서와 직무에 대한 충성이 있을 때, 교회에 필요한 무언가가 부족하여도 내 교회는 넉넉한 것 같고 그래서 소유한 적은 것도 큰 마음을 갖고 나눌 수 있는 ‘가정같은 교회’와 ‘교회같은 가정’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가정의 달 5월에 이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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