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語’ 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섭공이 공자에게 ”우리 무리들 중에 정직한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가 그것을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직이란 우리 무리에서는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父爲子隱),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니(子爲父隱),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孟子’ 에 또 이와 비숫한 글이 있습니다.
“만약 舜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죄를 지어서 재상인 고요를 시켜 고수를 체포하게 한다면, 순임금은 천자의 자리를 버리고 아버지를 업고 몰래 도망갔을 것이다. 이는 아비의 잘못을 자식된 자가 감추려는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와 자식간에 잘못을 숨겨주고 고발하지 않는 것은 천리이며 지극히 당연한 인지상정 이라는 가르침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일반인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리워져 있는 허물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조심스럽게 우리의 잘못, 교만한 마음, 입 밖에 내지않는 분노, 재물에 대한 탐심, 억제하기 어려운 시기심과 질투, 추한 상상 등을 우리의 이웃들로부터 숨기워 왔는가? 또한 한편으로는, 세상이 나의 허물을 보고 있고, 하나님께서 나의 부족과 허물을 모두 알고 계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우울해 하면서도 오히려 더 순결한 태도로 남의 시선을 가리며 내 스스로를 관대하게 보며 자위하는 삶을 살아왔던가! 나의 부족이 알려지지 않고 내 죄가 용서 받기를 원함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능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가까운 사람 즉 집안 식구나, 집안 식구처럼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 비록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정죄함으로 그 골육의 도나 친교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비록 얼마간의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오래된 옛정까지 잃어버리면 어리석음을 면치못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허물의 유무가 먼저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먼저인 것이다. 죄나 허물을 용납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남의 흠만 보고 지적하는 태도는 상대가 누구이고 간에 의가 갈린다. 많은 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다른이의 흠을 가장 빠르게 그리고 많이 찾아낸다는 심리학자의 주장이 기억난다. 필자도 허물많은 인간이기에 남의 허물을 꽤나 많이 살피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하기에 주변에 변변한 친구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50이 훌쩍 넘어 60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니 다소 철이 드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가까이 지내다 보면 문제도 생기고 허물이 보이고 냄새도 나는데, 본질에 대한 신뢰가 굳건하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낸 노아의 허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비의 허물을 가려주지 못한 함의 행위를 죄 있다 하시고 저주하셨다. 그리고 아비의 부끄러움을 가리며 보지않으려는 야벳과 셈을 도리어 축복하셨다. 상대를 깍아 내림으로서 얻는 달콤한 우쭐함의 시간은 순간적이지만 상대의 마음에 남는 상처는 크다. 더욱이 가까운 이로부터 받는 상처는 영원할 수 있다. 가정의 달 5월에 혈육의 부족함 과 받은 상처 때문에 등지고 있는 모든 이들이 한번 되새겨 볼 글이요 말씀인 것 같다. (dahn195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