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에서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중에 나는 우리 교회 맞은편에 있는 맥도날드가 내것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라고 이야기 한 것을 한국에서 이모집에 방문한 청년이 자신의 이모를 따라 교회에 왔는데 설교중에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집에 돌아가자 마자 자신의 이모에게 말하기를 “이모교회 목사님이 맥도날드 가게 사장님이시면 목사님께 말씀드려 맥도날드에 나좀 취직 시켜주세요”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모는 “얘야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앞에 있는 맥도날드가 내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목사님이 새벽 예배를 마치고 그 맥도날드에 교인들과 자주 들리는데 일하는 종업원들이 목사님을 단골손님이라 생각하여 목사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인사도 잘하고 커피도 원하는대로 주고 더 필요한 것이 없으십니까 물어도 보고 다음에 또 들려 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종업원들이 목사님에게 사장님 대하듯 깍듯이 대하기에 우리교회 목사님은 교회 맞은편에 있는 맥도날드가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고 사신다는 것을 설교시간에 말한 것이지 그곳의 주인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그말을 들은 청년은 주일 낮 설교시간에 목사님께서 언급한 맥다방(맥도날드)에 대해 이해를 하였다.

그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이야기 하고자 한 목적은 “삶의 행복은 누리고 사는 자의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복을 소유의 개념으로 보는데 그 목사님이 바라보는 것은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삶의 행복을 소유의 개념으로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이 바라는 것이 자신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면 그 채워지지 아니하는 부분 때문에 항상 불안해 하기도 하며 그것이 흡족하게 채워지지 아니할때에는 불평을 하게된다.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있다할지라도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한번 활용하지 못하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이 혹시 사라질까봐 불안해 하기에 “삶을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감사함이 무엇인지도 모를뿐 아니라 삶 가운데서 풍요로움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안타까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누리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는 생각의 차이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가올 미래의 현상에 대해 한 발짝 앞에서 갈망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오늘을 즐기지 못하고 내일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에” 삶이 항상 긴장과 초조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사람은 현실에 대해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과거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로 “어제만 부러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래도 한국에서는 지난날 잘나가던 사람이었는데”,“그때 미국에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히 자식들 때문에 이게 뭐야”,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다른 것을 했을텐데”라며 지난날에 얽매여 현실에 대한 불평만 늘어 놓게 된다.

인생을 한 박자 빨리 생각하여 다가올 미래에 대해 근심걱정을 하는 사람이나 과거 속에서만 머물러 지난날을 후회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의 삶에 주어지는 환경을 절대적으로 행복이라고 느끼고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과거나 미래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데 그 이유는 현실은 과거나 미래와 같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맛보는 것이라 볼때 현재의 삶과 자신이 몸을 담고있는 곳도 아름답게 느껴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이 이세상에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 어디에다 두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시애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시애틀에 비가 내리는 것을 행복이라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비가 많이 내리기에 미국 중부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한 물맛을 느끼고 산에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름다운 설경도 보게되고 봄에는 어느 산이든 가기만 하면 한국사람들이 즐겨하는 고사리도 딸 수 있고 바다에 나가면 마음껏 조개류와 어류도 낚을 수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도 타주와는 다르게 깨끗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곳 시애틀은 비가 많이 내려 우울해서 잠못이루며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너무나 아름답고 자연환경이 좋아서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행복한 곳이라 생각한다.

아름다운 환경이 주어져도 주어진 환경에 대해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예를 성경에서 들자면 “돌아온 탕자의 비유”이다. 어느 부자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중에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상속을 요구하여 상속을 받고 그것을 가지고 타향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가 얼마되지 아니하여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다 잃고 거지신세가 되어 친구들도 다 떠나고 아무도 그를 보아 주는 사람들도 없을 뿐 아니라 그를 받아줄 곳이 한 군데도 없게 되자 그가 깨달은 것은 나는 무능한자이며 아버지를 배반한자이며 하나님께 죄를 지은 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그가 살 것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후 그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현실에서 주어지는 상황을 시간과 공간적인 개념에 대해 만족을 느끼며 행복을 누리고 사는 일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과 사고를 바꾸지 않는한 현실에서 보여지는 어두움의 색깔을 밝은 색깔로 볼수 없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하고 그분을 통해서만 현실의 삶을 기쁨으로 누리고 현실의 난관을 뛰어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행복을 누리고 살기를 바란다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시편35:9절은 말하기를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인간에게 가장 가치있는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생을 얻고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마다 행복을 위해 소중한 것들이 다양할 것이며 추구하는 성공적인 가치관도 각기 다르지만 행복의 가치는 우리의 소유도 아니며 우리가 가진 제한된 능력도 아닌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또한 그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