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가시나무떨기가 불타면서도 숯이 되지 않고 파랗게 살아 있었다. 모세는 이 광경을 보고 놀랐다. 신앙의 첫째 단계는 경이의 단계, 놀라운 단계, 이상함을 느끼는 단계이다. 이와 같이 ‘경이로움’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중요한 동기가 된다.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느껴지는 놀라운 은사, 세계사 속에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 자연을 성찰할 때 느끼는 ‘경이감’, 이 모든 불가사의한 사건에서 감격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이다.

신앙의 둘째 단계는 실천의 단계, 친행(親行)의 단계, 윤리의 단계이다. 모세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가 보았다. 신앙의 첫째 단계를 마음의 단계라고 한다면 둘째 단계는 몸의 단계이다. 몸의 단계는 실천이 뒤따른다. 이때가 되면 신자는 열성이 있는 실천자가 된다. 신념이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행동)이 되고 체질화 되는 단계이다.
신앙의 셋째 단계는 신비주의의 단계이다. 처음에 모세는 “민족을 구하러 가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회피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사건, 손이 문둥이가 되는 사건을 통하여 모세에게 강권하신다. 결국 대화 끝에 하나님의 마음과 모세의 마음은 일치하게 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에게는 세상 근심이 없어지고 마음은 희열과 환희로 가득 찬다. 신비 경험은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는 놀라운 합일의 세계이다.

신앙의 넷째 단계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이웃과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투신하는 단계이다. 신비 경험은 최고의 단계이지만 최후의 단계는 아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황홀하여 장막 셋을 짓고 거기 머물기를 원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백성이 기다리고 있는 산밑으로 다시 내려가셨다. 모세도 하나님과 대화하는 신비한 경험 후에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산밑으로 내려갔다.

이번 선교지 방문을 통해 신앙의 넷째 단계에 도달한 소중한 이들을 만났다. 물론 신앙의 첫째 단계와 셋째 단계에 들어선 중국 한족과 조선족 교인들과 함께 예배도 드렸다. 그곳에서의 놀라운 하나님의 선교사역 진행들은 실로 신앙의 단계들을 확연히 보게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본국의 언론을 통해 잠시 듣게 된 어느 한국교회연합회의 소식은 위의 단계들에서 많이 이탈해 버린 단계로 비쳐져서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강 건너의 동족들과 어린이들의 생명을 살리고 이 민족이 가야 할 길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역하고 있는 국경일대의 선교사들과 자신의 욕심과 안락을 포기하고, 힘들고 어려운 동족선교사역을 위해 소속단체의 이름을 넘어 서로가 협력할 것을 다짐하는 고국의 목회자들과 의료진들을 만났던 것은 신앙의 최고단계인 투신하는 자의 결연함과 하늘의 기쁨을 오히려 느끼게 했다.

특별히 이번 방문에서 죽음의 강을 어렵게 넘어 왔던 그 어린 형제를 꼭 껴안고 기도하던 중에 분명히 느꼈던 것은 이 가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어느 단체 어느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최고단계의 신앙의 사람이 될 것을 바라시는 하나님이셨고, 우리들의 우왕좌왕하는 불신앙에 최후의 신앙단계인 부활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셨음을 고백한다. 주님의 그 힘든 십자가 너머 최후의 부활이 있었듯이 우리의 동족과 민족의 온전한 회복도 우리(한국교회)의 더 이상의 욕심과 분열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고 우리들의 “헌신과 협력”이라는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최고의 신앙(패러다임 쉬프트)을 보여야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우리 동족과 민족의 운명은 우리의 최후 신앙인 “부활의 생명력”으로 품을 때 비로소 완성되어 갈 것이다.